(펌)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 - 제 3 부
역사추리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 [제 3 부]
20 .엽장 황폐가 불러온 제주 라이카의 엑소더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조선 궁중이 진도와 완도에 금렵을 실시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들 지역에 사슴 사냥이 크게 행해졌다고 봐야한다.
여기서 잠깐 머리를 돌려 생각해보면 유명한 로빈 후드의 줄거리는
이들 남해안 사슴 사냥꾼들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좋은 본보기가 될듯하다.
의적 로빈 후드가 이끌던 무리의 상당수는 왕실의 사슴 수렵장으로
지정되어 서민들의 출입이 금지 된 셔우드 숲에 숨어들어 밀렵을
일삼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사슴을 노렸던 이유는 가죽과 고기를 얻기 위한 단순한
것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고가의 녹용을 노린 한국 남해안 사슴
사냥의 무리의 크기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결과적으로 남해안 일대에 퍼져 나간 제주 라이카에 대한
수요도 컸었고따라서 제주도에서 건너온 라이카의 숫자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는 생각을 낳게 한다.
나의 생각은 날개를 달고 비행을 계속했다.
개인 라이카가 제주에서 건너왔을 바에야 그 주인들인 제주도의
사냥꾼인들 바다 건너 안 건너왔을 리가 없다.
“ 왜 이렇게 많이 몰려 나왔을까?”
나는 이들 제주도의 사냥꾼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파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멀리서 울려오는
닭 우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어느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밀려오는 졸음에 더 이상의 생각을 미루고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다음 주말부터 매주 빼지 않고 부지런히 서울의 도서관을
오가며 제주의 사냥꾼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조사 목표는 두개가 있었다.
하나는 제주도 사냥꾼들의 실태.
두 번째는 이들이 남해안으로 이주해 가야했던
좀더 자세한 이유와 경위.
서너 번의 서울 나들이가 되풀이되자 도움이 될만한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모은 자료 중에서 척박한 풍토 때문에 먹고사는 직업이 제한 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에서 돈벌이가 괜찮았던 사냥을 직업으로 택했던 사람들,
다시 말하면 사냥꾼들이 다량 존재했었다는 희미한 족적들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몽골 지배 시대부터 제주도에 엽호[獵戶]라고 직업으로 분류되는
사냥꾼들이 있었다.
호[戶]라는 직명은 몽골식의 호칭이다.
이 명칭 방식은 몽골지배가 끝난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남아
이 순신 장군도 젊은 시절에 역임했었던 만호[萬戶]라는
하위 무관직 명칭이 있었다.
구한말까지도 관명에 쓰는 이 호칭이 그대로 남아있어
오늘의 이장에 해당하는 사람을 백호장이라 불렀었다.
제주의 몽골인들은 목호[牧戶]라는 목축업 종사자들이 절대
다수였음은 여기서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섬이라는 제한된 지리적 여건으로 제주에서 가능한 것은 아마
신통치 않은 농업과 수산업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다 몽골 인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도 않고 어업은커녕 생선은 잘 먹지도 않는다.
이들이 제주도에 목축업을 도입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고 따라서
말달리고 활 잘 쏘는 상무[尙武]의 민족인 몽골인들 중에
제주도에서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註:앞서 몽골에서 개 80 마리가 영입된 기록을 상기하기 바란다.]
몽골인들이 사냥을 심하다고 했을 만큼 좋아 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ㅡ고려 충렬왕 7년 나주 해남 지역 역참 책임자 탑자적에게
이 지역에서 무분별한사냥을 해서 민폐를 끼치는 역참의 병졸들을
단속하라는 원 황제의 칙령이 있었다.ㅡ
그 먼 북경의 원 황제 귀에까지 이런 소문이 들어갔던 것을 보면
이들의 사냥이 대단히 극성스러웠던 것 같았다. 이 남쪽 지역이라면
사슴이 서식하던 지역이다.
이들 사냥꾼들, 즉 엽호들 중의 하나인 성금이라는 자가 동료를 규합해서 반란을 획책했었던 사실은 제주 사냥꾼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게 해준다.
[ 동료의 호응을 기대하고 반란을 계획했다면 적어도 그 숫자는 적어도 수 백명, 많게는 수 천이 되었을 것이고 이것은 몽골 지배시 제주 인구 -이만에서 삼만 추정-를 감안하면 대단히 많은 숫자이기도 하다.]
여기에 제주가 가진 천혜의 사냥터라는 매력은 이들을 더욱 유혹했다.
옛날 제주도는 전체가 원시 시대이래 변하지 않았던 초원과 밀림의
보고였다.
그 어마 어마한 밀림의 크기는 몽골의 일본 침공 때 백 여척의
선박을 건조할 목재를 제공했던 사실로 증명될 수 있다.
깊은 밀림과 호랑이 같은 맹수의 부재는 사슴이나 노루 같은 풍부한
사냥감을 제공했을 것이다. 너무 지나칠지는 몰라도 이 무렵의 제
주도는 지금 세계적인 관광지로 소문난 케니아의 세렌케티 공원에서처럼 동물들이 떼로 몰려 다니는 장관들도 볼 수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들 많을 수밖에 없었던 제주 사냥꾼들은 다음 단계의 연상을 가능케 한다.
한정된 지역에 다수의 사냥꾼들이 사냥을 하게 되면 제 아무리 풍부한
사냥감이라 해도 버티어 낼 수가 없다.
남획은 대상 동물의 급속한 멸종을 가져온다.
이것은 한때 미주 평야를 담요로 덮듯 왕성한 번식을 하던
일 억두 가까웠던 미국 들소가 백인에 의한 남획이 시작된 지 불과
삼십 년도 되지 않아 수백 마리로 줄어든 역사가 말해준다.
제주의 꽃사슴은 육지 보다 조금 이른 1914,5년경에 한라산
남쪽 기슭에서 일본인 사냥꾼 가라지마 [樺島]에게 잡힌 꽃사슴을
최후로 멸종되고 말았다.
[ 육지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강원도의 꽃사슴은 1920년도에 멸종했다.]
그러나 제주의 꽃사슴은 이미 몽골족에 의해서 사냥이 집중적으로 행해지던 고려 말부터 감소하는 징조가 보였다.
원래 제주에는 중국에 알려질 만큼 사슴들이 많았었다.
중국의 사서 수서 백제전에 이런 글이 있다.
‘ -- 진[陳]을 평정한 해에 [589년_수나라 초기] 전선이 표류해 해동
탐라국에 닿았다.
그 나라는 남북으로 1 천리이고 동서로는 수백 리이며 토산으로 많은
노루와 사슴이 있다.’
그러나 반 천년이 흐른 그 뒤 고려사 31권을 보면 몽골인들이 제주
에 살던 시기의 제주도 산물을 아래 와 같이 기록하고 있음이 보인다.
‘ -------원은 고려 무관을 통하여 탐라로부터 말을 포함한
쇠고기, 피화 [皮貨-모직물류], 수유 [버터류], 포[布] , 오소리 ,
들 고양이 ,족제비, 노루등의 동물 가죽을 가져갔다. ’
별로 값나가는 것도 아닌 들 고양이 가죽까지 포함되어 있는 위의 품목에 사슴 가죽이 없음은 유의 해 볼일이다.
사슴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고 쓸모가 많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상품이다.
제주도에 사슴이 많았다면 당연히 위의 품목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목에 사슴 가죽이 없는 것은 제주도 사슴의
숫자가 남획으로 급감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가 있다.
여기서 덧붙여 말한다면 국제 무역 상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위의
품목들 중 축산품과 모피류가 주력품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앞에서 말했던 제주도 사냥꾼들의 숫자가 역시 만만치 않게
많았음을 다시 한번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 작은 면적의 제주도에서 대단한 규모의 사냥이 실시되어서 사슴의 숫자를 급격히
감소 시켰음을 알 수가 있다.
그래도 조선 숙종 28년 [1702]까지는 사슴이 그런대로 있었던 것 같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제주도를 한달간 순력[巡歷]하고 그 내용을 41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이 그림중 교래대협[橋來大獵]이라는 그림은 기마병을 동원한 군사 훈련 목적의 대규모 사냥을 나타 낸 것인데 이 그림에 기병들에게 쫓기는 사슴의 떼가 보인다. (KBS 방영)
그러나 그 뒤 제주도 옆 비양도에 양록장을 만들어 놓고 사슴을 기르기
시작한다. 사슴이 풍부했으면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기동성 좋은 사냥꾼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최고의 사냥감인 사슴이 풍부한 육지,다시말하면 본토 남해안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사냥의 필수 도구인 제주의 라이카도 주인을 따라 육지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더구나 남해안은 녹용의 시장인 본토와 가까워 판로 개척도 쉽고
중간 상인의 횡포도 덜 해서 제 값을 받을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이쯤 밝히고 보니 앞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같은 지역 생활권인
남해안에도 금렵을 시행할 정도로 사냥꾼들이 많았던 것은 사슴 숫자가
줄어든 제주도에 넘쳐흘렀던 사냥꾼들의 수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앞서 말했던 많은 제주민들이 남해안 일대로 진출했었고 이들 중
다수가 사슴을 쫓아서 육지로 나온 사냥꾼이라는 공식은 이렇게 해서
성립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 고향을 떠난 제주도의 사냥꾼들이
남해안에 퍼져 나간 경로를 추적 해봤다.
역시나 제주와 멀리 떨어진 경상도 해안의 거제도의 순종 개들에서도
제주개와 진돗개 사이에 있었던 이주의 공식이 발견되는 것이었다.
제주개와 진돗개와 거제개는 같은 식구임을 암시해주는 검정색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음을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거제개는 진돗개 보다 크다.
게다가 털색이 각양각색인 진돗개와는 달리 거제개의 털 색깔은
라이카의 것이기도한 검정색 일색이다.
다시 말하면 거제개는 소형견인 진돗개 흑구보다는 혈통적으로 체격이
큰 제주 라이카에 보다 더 가깝다는 말이다.
진도보다 제주도에서 훨씬 먼 거제도에서 더 혈통이 가까운 라이카의
친척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한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암시해준다.
진도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거제도에 라이카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이다.
진도를 비롯한 전라도 해안에 먼저 라이카가 소개되고 사슴 사냥이
장기간 행해지면서 사슴이 감소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엽장 이동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제주도 사슴이 남획으로 감소하자 제주 사냥꾼들이 육지로 몰려나온
현상이 육지에서도 되풀이 되었을 것이다.
사슴의 숫자가 줄어들자 제주의 사냥꾼들은 뱃길은 훨씬 멀지만 사슴이
대량 서식하는 경상도 거제로 옮겨 갔을 것이고 이 엑소더스가 시작된
시기는 비교적 현세에 가까운 근세시절일 가능성이 크다.
유입의 시기가 비교적 늦었었고 혼혈화의 시간도 짧아 거제개는
라이카의 순수성을 많이 간직하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었다.
반면에 진도 방향으로의 제주 라이카 진출은 시들해졌을 것이며
순혈의 유입이 뜸해진 진도 일대의 라이카는 타견들과 혼혈을 해가며
진돗개가 되었으리라.
물론 제주민들이 이주하는 것에만 제주 라이카의 남해안 정착을
연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남해안 일대에 사슴사냥이 유행하면서 제주 라이카에 대한 수요가 커져
현지민들도 직접 제주도에 가서 가져왔거나 또는 제주 라이카를
팔고 사는 어떤 상거래의 유통망이 생겨 있었을 것도 틀림이 없다.
21. 개와 사슴 사냥.
그러나 “제주 라이카의 이동 경로 발견” 이라는 횡재에 한 때 크게
달아올랐던 흥분이 가라앉자 다음에 할 일이 릴레이 경기의 바턴처럼
머리 속으로 넘겨져 왔다.
이미 앞에서 설정했던 두개의 조사 목표중 첫째의 것, 다시 말해서
남해안 일대에 순종 사냥개를 남겨놓을 만큼 왕성하게 행해졌던 사냥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 에 대한 해답을 찾은 만큼, 둘째의 목표,
‘이 사냥에 왜 라이카가 요구되었던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라이카의 무슨 능력이 남해안 사냥꾼들에게
그렇게 크게 평가되었고 또 요구 되었었던가 ?'의 해답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두 번째 해답을 얻기 전에 우선 개사냥에 대한 설명이 필요 할 것 같다.
옛날 몽골인들이 즐겨하던 사냥 방법은 기마 민족답게 말을 타고
달리며 할 수있는 매 사냥과 개 사냥이었다.
그 개사냥이 한반도에 건너와 라이카와 함께 한국에 정착 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몽골의 개사냥이 한국에 정착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의 배경이 있었다.
여기서 먼저 한 의문에 대한 해답부터 찾아야 할듯하다.
“과연 사슴을 개로 잡을 수가 있었을까?”
오늘날 사슴 사냥이 성행하는 세계 주요 국가 어디에서도 개를 동원한 사슴 사냥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근세에 들어와 한국의 직업 사냥꾼들이 주로 사용하던
녹용 사냥 방법은 사슴이 주기적으로 섭취해야하는 소금을
사슴이 다닐만한 길목에
뿌려놓고 사슴이 나타나면 쏴 잡는 일종의 미끼 사냥의 방법이었다.
지금도 미국의 곰 사냥이나 아프리카의 사자 사냥은 이 방식으로 한다.
단지 미끼를 소금대신 상한 고기나 산 가축을 쓰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소금을 뿌려놓고 사슴을 유인하던 미끼 사냥은 사슴이 희소해진 후기에 와서 행해지던 사냥 방법이었다.
사슴이 흔해서 발자국 잡기가 쉽다면 추적 사냥이 가능하다.
이 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사슴의 떼를 보았다는 대목을
상기해보자.
이 말은 사슴의 숫자가 대단히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슴이 이렇게 많았다면 발자국을 잡기가 쉬었을 것이고 또한 개를
앞세운 추적 사냥이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유효 사거리가 기껏해야 50미터를 조금 넘는 활을 가지고는
주위
경계를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 사슴에 접근하거나 비호같이 달아나는
사슴을 추적해서 사격하기도 힘들었을 터이니
개를 제외하고 별다르게 뾰족한 사냥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장거리 라이플이 발달된 오늘날에도 개사냥은 가장 생산성이 높은
사냥 방법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준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문뜩 생각나는 것이 있다.
서양에 디어 하운드라는 사슴 사냥 전문의 사슴 사냥개가 있다.
이 개는 지금 본래의 전문 목적에서 벗어나 여러 짐승 사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이름대로 원래는 스코트랜드에서 사슴 사냥
전문 개로 배출된 개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한국에 가까운 일본에도 마타기 견이라는
사슴 사냥 전문의 사냥개가 있었고 미국에서도 이십 세기 초까지 개로 하 는 사슴 사냥이 성행했었다고 한다.
그 성공율이 너무 높아 사슴들이 지나치게 많이 잡히니까 주에 따라서는 사슴 사냥에 개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곳도 있다.
이런 사실들로 보아 남해안에서 행해진 사슴 사냥이 여건 적으로나
효율적으로나 제주 라이카가 동원된 개사냥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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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백두산 포수 최 석도씨도 사슴 사냥에 주력 좋은 두 마리의
사냥개를 써서 사냥을 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말 사슴이 너무 커서 개가 직접 잡지는 못하고 사슴의 퇴로를 차단하여
도주를 막으면 최 포수가 접근해서 총으로 잡는 방법을 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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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왜 라이카야 했던가?
문제의 핵심은 다음이다.
남해안의 사슴 사냥이 개를 동원한 추적 사냥이었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이 논리의 완벽한 완성을 위해서는 왜 하필이면
라이카만이 이들 사슴 사냥에 필요하여 제주도에서 건너와야 하는
것인가 의문에 답하여야 하는가를 풀어야 할 것 같았다
이 것은 나에게 진돗개 조상 찾기를 시작하게 한 마디
‘ 흑구가 진돗개의 원종이다.’ 이라는 수수께끼의 일부를 풀 수도 있다.
제주에서 건너온 라이카가 진돗개의 조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이 말이 아지랑이처럼 희미하게 보여주는 여러 모습들에서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흑구, 즉 라이카에 대한 진도 주민들의
높은 평가 ,선망, 소유욕등이다.
좀 더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이것은 여러 피들이 들어가 혼혈이 되고
작아진 오늘날의 진돗개 보다 사냥개로서 더 이상적이었다는
뜻도 품고 있다.
왜 라이카가 현지 민들에게 그 같은 높은 평가를 받았던가 ?
그 것은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서 라이카의 그 지역의 어떤 사냥개보다도
뛰어난 사냥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나는 하필 라이카만이 사슴 사냥개로서 크게 각광을 받은 이유를 푸는
해답에서 남해안에 진돗개 등의 순종이 살아남았던 이유를 설명
해줄 수 있는 길이 보인다고 봤다.
개사냥을 아는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이 해답은 단순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예를 들자면 지금 사냥 능력이 우수한 멧돼지 사냥개들은
이 피 저 피 섞인 잡종견들이 태반이다.
옛날에도 굳이 순종개인 라이카를 고집할 필요 없이 잡견들을
훈련시켜 우수한 사슴 사냥개도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답을 얻는 것은 남해안 일대에만 순종 개들이
보존된 이유의 일부 해답도 될 듯했다.
이 점에 대한 해답은 나로서도 어느 정도 짐작이 안가는 바도
아니었지만 역시 개사냥의 전문가 인 정 사장의 의견을 들어
보는 것이 좋을 듯 했다.
어느 일요일 나는 고민하던 이 문제 풀이를 위해서 정 사장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일요일에는 세상없어도 집에 붙어 있지 않는 그는 아니라 다를까
동해의 바다 위에서 전화를 받았다.
새벽부터 시작한 바다낚시에 온통 정신이 없었던 그는 저녁에
만나자는 나의 청을 쾌히 응낙했다.
“ 잘 됐습니다. 오늘 가자미도 많이 잡았는데 생선회에 한잔합시다.”
석양이 땅 그늘을 진하게 만들 무렵 나는 차를 몰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먼저 도착해서 가자미회를 쳐놨다가 즉시 술상을 보아왔다.
나는 첫잔을 받으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찾아온 용건을 털어놓았다
내가 진돗개 조상 찾기에 남해안 사슴이라는 새로운 열쇠를 발견한 것부터 자치지종을이야기 해가자 정 사장은 젓가락마저 놓고 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는 한마디 결론으로 말을 맺었다.
“ 뻔한 것을 새삼스럽게 꺼냈는지 모르겠어. 왜 남해안 사슴사냥에
하필 라이카만 적절한 개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 이유를 알고 싶군.
당신은 전문가니까 알만한 해답을 내놓을 것이 아닌가?”
정 사장은 나의 말이 끝나자 술잔부터 들이켰다.
그리고 손으로 입가를 쓱 닦아내자 힘이 들어간 목소리를
말문을 열었다.
이미 해답을 알고 있는 자신의 전문성을 한껏 과시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 으흠! 드디어 이 전문가가 한 말씀 할 기회가 왔군,”
나는 별 수 없이 웃으며 그의 허세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 미안하네! 한 수 가르쳐 주시지. 전문가 님! ”
정 사장은 나에게 정말 한 수 가르치듯 서당의 훈장처럼 한껏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 .형님이 조사하는 테마를 위해서 기초부터 말해 드리겠오.
형님도 진도에 갔다 오신 일이 있지요? 그리고 거기서 오직 사냥 잘하는 진돗개만을 골라서 육성하는 분들을 보셨지요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도에 가서 보았던 일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잠깐 여기서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얻어 이야기의 곁길로 들어가 본다.
23. 진짜 진돗개
근래에 들어와 진돗개가 당국의 보호책으로 대단한 기세로 숫자도
늘어 난 것까지는 좋았으나 본래 사냥개였던 진돗개가 본래의 위상을
빗겨가서 가정견으로 변질 해 가는 것은 뜻 있는 인사들이
매우 우려하는 현상이었다.
사냥을 못하는 진돗개란 진돗개가 산야에서 발휘하는 격렬한 야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생각하기도 싫은 꼴불견일 것이다.
나의 머리에 어느 진돗개 애호가가 왕년에 유명한 새 사냥개로
많은 포수의 사랑을 받던 칵커 스패니얼이 사냥개답지 않게
미려한 외모 때문에 사냥 본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가정에서 재롱이나 떠는 신세로 전락한 전례가 더욱
국견 진돗개의 앞날을 염려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우려했던 기억이
머리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진도에 사는 소수의 인사들은 말한바와 같이 사냥능력이 우수한
진돗개를 되살려 육성해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 사장은 그 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는 진돗개 세 마리 중 억세게 생긴
두 마리는 그가 직접 진도를 몇 번씩이나 왕래하면서 그들 중
한사람인 최 선생 댁에서 사온 것들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 이 정도면 그들이 키우는 사냥 진돗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겠군요?”
그 것은 불문가지[不問加知]라는 한문 투의 표현이 어울리는
질문이었다.
그 만큼 최 선생 집에서 기르던 사냥개를 봤을 때 받았던 나의
충격은 컸다.
나는 그 개들을 진돗개라고 생각 할 수가 없었다.
억세고 험상궂게 생긴 그 개들의 외형은 우리가 생각하던 진돗개의
표준 체형에서 크게 벗어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말을 돌려 진돗개의 체형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한다.
초보 애견가들은 잘 모르는 사실로 진돗개는 체형에 따라
세 가지 종류로 분류가 된다.
가장 흔하고 또 일반 애견가들이 좋아하는 종류로 겹개라는 것이 있다.
일반 애견가들이 진돗개의 이상형으로 생각할만한 균형 잡히고
다부지게 생긴 개로서 진돗개의 표준체형에 가장 충실하다
또 다른 개로서 굴개라는 것이 있다.
이 개는 마치 옛날 홍두깨처럼 작고 단단하면서도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체구가 작은 만치 좁은 굴속에 숨어 들어간 너구리나 오소리를
잡아내는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
흑구 진송이가 바로 굴개로서 그의 후손 하나가 이사장이 자랑하는
세 마리 사냥개의 하나이다.
굴동이라는 조금은 익살스러운 이름의 이 개는 굴 사냥에서
천부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작년 가을 겨울에만 값비싼 오소리를
다섯 마리나 잡았었다.
그리고 마지막 종류로 홑개라는 것이 있다.
이 개는 깡마르고 못생겼지만 우수한 사냥개는 바로
이 종류에 집결해 있다.
내가 최 선생 댁에서 본 사냥 전문의 진돗개는 이 홑개의 극단적인
형이었다.
우선 진돗개답지 않게 키가 무척 컸다.
그리고 주둥이가 이리처럼 길었다.
팔각형이 이상적인 진돗개의 두상이라는 통설과는 달리 머리가
아주 크고 귀 와 귀 사이가 넓어서 역삼각형이었다.
귀는 어른의 큼직한 손바닥을 연상시킬 만큼 넓고 길었다.
꼬리는 똬리처럼 말린 둥근 모양이 아니라 마치 빨래 방망이같이 빳빳이
선 장대꼬리였다.
게다가 온몸을 울퉁불퉁한 근육이 감싸고 있고 인상마저 험상궂어
마치 한 마리의 겁나는
맹수 옆에 다가선 듯한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행여 이놈들이 달려들까 조심하면서 최 선생에게 한마디 물었다.
“ 이 개들 진짜 진돗개 맞습니까 ?어쩐지 순종 진돗개의 표준 체형하고
상당히 다른 것 같은데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신 것이나 아닌지요 ?"
멧돼지 사냥꾼 중에 새로운 사냥개를 만든다고 이 개 저 개 교미를 시키며 실험을 하는 유행이 일고 있음을 아는지라 나는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최 선생은 나의 눈치 없는 말에 당장 얼굴에 노기부터 띄웠다.
“ 순종 표준형이라니요? 나는 그런 바보 놀음에 눈곱만치도 관심 없어요.”
나는 무색해진 마음으로 그에게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 왜 그러십니까 ?”
최 선생은 화가 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 진돗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책상 물림들이 왜놈 개들의 표준 체형을
흉내 내서 만든 것이 진돗개의 표준 체형인지 뭔지가 되어 버렸는데
이 것이 진돗개를 다 망쳐 버렸어요.”
나는 그의 파격적인 독설에 놀랄 수밖에 없었으나 진돗개의
원종일 수도 있는 흑구를 아예 순종 대열에서 제거해버려 잡견 취급을
받게 만든 시행착오를 자행하고도 그 잘못을 장기간 시정
하려고 하지 않은 관계자들에게 대해서 반감이 있었던 터라
관심을 가지고 그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여보시오. 선생! 사람을 예로 봅시다. 겉만 번지르르 하고 아무런 생활능력도 없으면 주변에서 어디 사람 취급을 해줍디까 ?
비록 생김새가 잘나지 못했어도 생활 능력이 있어야 그게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그는 계속 노기 띈 어조로 말을 이었다.
“ 진돗개는 대대로 내려오는 민족의 사냥개요!
순종인지 아닌지는 당연히 그 사냥 능력이 구별의 기준이
되어야 해 요.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돼서 생긴 겉모습이
기준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구려!
진돗개를 안답시고 나대던 전문가라는 책상물림 중에 진돗개를
데리고 산과 들을 뛰며
사냥을 해본 경험이 있는 인간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것 같아서 안타깝소.
-----정작 할 말 많은 나 같은 인간은 그런 곳에 얼굴을
내밀 수도 없으니 한스러울 뿐이요.”
비분강개 하는 그의 모습은 나를 적잖이 숙연하게 했다.
최 선생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갔다.
“ 여보시오 선생! 진돗개의 진짜 표준 체형이 바로 여기 있소! ”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험상궂은 그의 애견이 있었다.
그 개의 모습이 표준 체형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다시 뒷산을 가리켰다.
“ 저 산에 나의 증조부, 조부, 그리고 부친께서 잠들어 계시오.
그 어른들,
모두가 취미로 평생 개사냥을 하시던 분이요.
진도의 역사에는 우리 조상 어른들 같은 개 사냥꾼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을 것이오.
이분들이 수 백년 동안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되풀이 해가면서
이심전심 합의를 해서 상식화시킨 진돗개의 표준 체형을 바로
보 시다시피 이 개가 여주고 있소.
그러니까 이 표준 체형은 좁은 집안에서 진돗개나 몇 마리 길러보고
일본 책이나 한 두 권
읽어본 인간들 몇 명이 모여서 불과 몇 시간만에 결정한 것이 아니라
수 백년 동안의 피와 땀이 얼룩진 경험의 완벽한 결정체요. “
격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격한 감정을 토해내던 최 선생은
자신의 흥분상태를 과하다고 깨달았던가 숨을 크게 내쉬며 마음을
가라 앉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아까 와는 정반대로 힘없는
어조로 자신에게 말하듯이 중얼거렸다.
“ 그간 조상들이 잘 보존 해온 세계적인 사냥개가 일부 못난 자손들 때문에 못난 집개로 전락하고 있어도 나같이 못 배우고 못난 촌무지렁이가 할 것은 전혀 없으니 ------ 그저 답답하고 또 답답하기만 할 뿐이요.”
나는 그의 견해가 다른 진돗개 전문가로부터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심정적으로는 그에게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그곳을 떴었다.
“ 반드시 선생님의 노력을 세상 사람들이 고마워 할 때가 올 것입니다.”
24. 대형견 라이카.
지금 정 사장은 내가 최 선생의 집에서 봤던 험상궂은 개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 사장의 개들도 최 선생 댁에서 사온 것이기 때문에 그도 이 집을
여러 번 드나들었었다.
정 사장은 야수 냄새 물씬한 그 집 진돗개들의 생김생김을 거론했다.
“ 그들 사냥개들의 특징을 한번 생각 해 봅시다. 지금 최 선생이나
왕년의 진도 사냥꾼들이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그 분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사냥개 육성 방향은
내가 볼 때 적어도 기능적으로는 라이카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발한 지적이었다.
“ 라이카들의 뛰어난 용맹성은 타고난 기질과 대형 체구에서 나와요.
그래서 대형 [大形]이라는 라이카의 특징에 유의 해볼 필요가 있어요.
전투력과 체구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권투선수들이
체중에 따라 체급이
먹여진다던가 농구선수의 능력과 신장이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등이 그 좋은 본보기일게요.
마찬가지로 대물[大物]을 노리는 짐승 사냥개도 일정한 크기가
있어야 한다구요
사냥 진돗개의 육성 방향이 라이카를 지향했다 함은
즉 대형화 [大型化] 가 추구했던 기본 육성 목표였다는 말입니다.”
정 사장의 목소리는 점입가경으로 열기 섞인 엄숙함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조금은 덜렁거리는 편인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조금은
우스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말이 흥미로워 나도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계속했다.
“ 왜 대형화가 중요한가 ?
대형화를 추구하는 진도의 사냥개가 가진 특징 중 중요한
두 가지만 봅시다.
하나는 긴 다리들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사냥 진돗개는
여느 진돗개들 보다 훨씬 더 커 보이지요.
다른 하나는 긴 주둥이입니다 .이것 역시
사냥 진돗개를 이리 같은 야수의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은 형님도
잘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우수한 신체구조는 진돗개에게 추적을 위한 질주력과
제압을 위한 살상력의
우수한 능력 두 가지를 부여했어요.”
그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마당에 있는 흑구 굴동이에게 안주 한 점을 던져주곤 화제를 바꾸었다.
“ 난 말입니다, 개사냥을 다닌 지 십 년쯤 되었는데 역시 해보니까
돈벌 이야 오소리 사냥이 제일이지만 재미는 노루사냥입디다.
한 놈 퉁겨 놓고 뒤쫓는 스릴은 아무도 이해를 못해요.
반면 노루 사냥은 그 만큼 힘도 들고 어렵기도 해요.
노루라는 것은 대부분 고라니라는 소형 노루입니다만 티 브이에
나오는 제주도 노루처럼 뿔 달린 큰 놈도 가끔 만나지요.
진돗개들이 고라니는 그런 대로 해보는데, 이렇게 큰 놈을 만나면
잡기에 애를 먹어요.
더구나 우리 굴동이처럼 작은 놈은 우선 주력에서 뒤져서 어떻게
해볼 수도 없더군요.”
그의 말에 공감 가게 하는 말을 나는 진도의 최 선생에게서
들은 바 있었다.
뿔 달린 노루는 주력이 좋아서 고라니가 한번 도약에 밭 고랑
아홉 개를 넘을 수 있다면 이 놈은 열 두 고랑을
가볍게 넘는 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로 잡기가 힘들어 자신은 평생 단지 한 마리만
잡아보았다고 했었다.
여기서부터 정 사장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 내가 말입니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사슴 농장에 놀러
갔다 왔는데 거기서 대만산 꽃사슴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었어요. 생각 보다는 상당히 크더군요.
큰 놈은 작은 고라니의 두배는 되어 보입디다.
나는 보지도 못했지만 남해안에 살았다는 한국산 꽃사슴은 아마도
대만산 꽃사슴보다도 더 컸겠지요.”
그 것은 맞는 말이었다. 동아시아의 꽃사슴, 즉 다시 말하면 매화록은
왜소한 동남 및 남 아시아 꽃사슴( 엑기스 디어)보다. 훨씬 크다.
후에 동북 아세아산 꽃사슴의 크기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속초에서 러시아 자르비노항까지 여객 항로가 신설됐을 때 나는
직장동료들과 함께 중국 훈춘을 거쳐 연길까지 3박4일간 여행을
다녀왔었다.
그 때 나는 연길에 동물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시간을 내어 들렸다.
거기서 말로만 듣던 꽃사슴을 처음으로 보았다.
남아시아 사슴 -엑기스 디어
처음 본 동북 아시아의 꽃사슴은 디즈니 영화에서 보았던 아기 사슴
밤비의 이미지가 대입되는 그런 크기가 아니었다.
그 꽃사슴들은 정말 작은 제주도 말만큼이나 컸다.
동물원 직원은 꽃사슴은 뿔 달린 노루보다 무게로 따져서 네 배 정도
크다고 대답했다.
“ 그러니 속도도 훨씬 빨랐을 것이고 제압하기도 훨씬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쯤 이야기했으면 왜 덩치 큰 라이카가 남해안 일대에 퍼져나간
이유를 알만 하지요 ?”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장은 나에게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해 나갔다,
“ 이 점 사슴의 경우는 녹용 때문이라도 더욱 중시되어야 해요." 녹용은 부드럽고 연약합니다. 사슴을 단숨에 잡아채서 숨을 끊어 놓아야지 시간을 끌면서 격하게 저항하게 만든다면 그 와중에 녹용이 나뭇가지나 땅바닥 부딪혀 상할 수도 있습니다.
상한 녹용은 형편없이 싸게 취급되니까 더욱 질주력 좋고 전투력 좋은 라이카가 요구 되었을 것입니다. -------더해서 라이카가 남해안 일대에 흩어져 퍼진 또 다른 이유로 그 지역 일대에 살던 토종 개들의 체구가 작았었고 사냥 기술이 신통치 않았던 사실도 있었을 테지요.”
말은 길었지만 요점은 라이카의 남해안 확산은 용맹한 라이카의
큰 체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의 전문성 높은 소리는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뒤에 연길에서 진짜 꽃사슴을 본 뒤 라이카가 사슴을 혼자서
제압했기보다 여러 마리가 합동을 했거나 포수가 창이나 활로 제압
할 때까지 묶어 놓는 역할을 주로 했을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라이카의 용맹함과 큼직한 체구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판단은 역시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필 제주 라이카라는 견종이 왜 남해안의 사슴 사냥에 요구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대강 짐작은 하고 있다가 정 사장의 말을 듣고 더욱
확신을 가졌다.
자신의 전문성을 과시하며 내가 들고 간 의문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정 사장은 내가 만족한 표정을 짓자 으스대는 태도로 말했다.
“ 형님. 이런 대답을 해줄 만큼 수준 높은 개 사냥꾼은 대한민국에
몇 명되지 않아요.
형님은 행운아인줄 아시오.”
“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나중에 한턱 내지.”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었다는 생각에 그 날 밤 나는
오래 간 만에 개사냥 이야기를 안주 삼아 대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25.아지랑이 같은 라이카 후손의 자취.
한때 슬럼프에 빠져 조사를 중단한 바 있었던 나는 결국 행운에 힘입어
이 슬럼프를 극복하고 나온 이 시점에서 진돗개 조상 찾기를 마무리
할까하는 생각을 한 때 했었다.
진도에서 진송이를 데려올 때부터 이 조사를 시작했으니까 벌써
십 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진행 중에 있는 다른 연구 테마들도 있는데 무작정 진돗개 조상 찾기
조사를 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무리 하려고 하니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말한 이론을 뒷받침 해 줄 아무런 증명데이터가 없는 것이다.
나는 다시 며칠을 고민하다가 이렇게는 끝 낼 수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나의 가설을 입증해주는 방법을 찾았다.
나의 조사는 간단히 말해서 진돗개의 조상인 라이카가 몽골-->진도의
직접 경로를 통해서 진도에 유입됐다는 기존의 추측이 정확한 것이
아니라 몽골--> 제주 --> 남해안 --> 진도의 간접 경로를
통해서 유입되었다는 가설이 더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간접 경로를 이루는 각지에 서식하던 개들은
한 핏줄이었으므로 누가 봐도 인정할 일관성 있는 유사성이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것을 증명할 물증을 찾는 것이 이제부터
할 일이라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외견상 비슷한 특징이 있었다는 것만 밝혀도 독자들을
납득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이번 조사의 중심인 제주 라이카의 외형적 정체
밝히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러나 문제가 컸다.
그 연관성을 능히 추측 해볼만한 몽골 라이카와 진돗개의
실물은 있지만 중간의 고리에 해결되는
제주 라이카와 다른 남해안 순종 개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 되었으니 그 중간 고리를 증명해 볼 방법이 난감했다.
궁측통이라고 나는 실물이 없다면 본 사람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다음날부터 조사에 착수했다.
26.흰둥이가 된 거제개.
조사 대상을 제주도와 거제도로 압축하고 일차로 오고 가기가 편리한 거제도를 선택했다.
나는 부푼 기대를 가지고 조사에 착수했다.
이미 옛날 사냥을 조사한다고 진도에 무작정 내려갔다가 경비만 쓰고
허탕을 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는 전화 조사부터 실시했다.
거제개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법한 거제시 소재의 애견센터, 총포사,
동물병원, 노인정과 중학교의 생물선생에 까지 전화를 해봤지만
거제개나 또는 거제개를 알만한 사람에 관한 털끝만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업무를 젖혀놓다시피 하고 전화에 매달렸던 나는 늦은
오후 시간이 되자 기진맥진해서 전화 조사를 중단했다.
흔한 말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었다.
나는 사실 진도에 조사차 갔을 때도 아무 성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 왔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기 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낙담으로 하루를 보낸 나는 다음날 마지막 전화라고 생각하고
거제 시청의 축산 담당직원에게 전화를 했다,
여기서 성과가 있었다.
그 공무원은 친절하게 거제개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몇 년 전 개의 해를 맞아 거제 시청에서 거제개의 자손이 만에 하나
생존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대대적인 탐색 작업을 한일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얻은 수확은 풍문 수준의 막연한 것이었다,
거제개는 하얀 색깔이었고 사냥을 잘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얻은 빈약한 정보의 양에도 놀랐지만
부정확함에 더욱 놀랐다.
거제개에 대해서 아마도 유일한 기록일 이 상오 씨의 한국 야생
동물기에는 거제개는 검정색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제 시청의 조사 결과를 믿는 인사라면 이 기록의 신뢰성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상오 씨는 거제개를 직접 본분이었다.
같은 책에 그가 1930년대에 사냥터에서 검정 거제개가 신기[神技]에
가까운 재주를 부려 노루를 잡는 것을 보고 받은 깊은 인상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었다.
전문 수렵가이며 애견가이며 동물 연구가였던 그가 직접 본 거제게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실수를 했을리가 없다.
생각해보건대 거제개는 극심한 잡종화의 길을 걷다가
멸종 해 버린 듯 했다,
앞에서 이야기한바 있다.
육지의 많은 사냥꾼들이 성능 좋은 거제개를 사갔었고 생각 짧은
현지민들은 한목 잡으려고 혈통을 따지지 않고 대량의 잡종 강아지를
만들어서 팔다보니 거제개의 잡종화는 가속화 되었고 결국 거제개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따져보지 않는다 해도 순종개가 사라지기 전에는
이런 잡종화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 단계에서는 사람들은
잡종개를 순종개로 오인하는 실수도 생긴다.
본보기가 오늘날 진짜여부의 시비가 끊이지 않는 삽살개가 될 것이다.
흰 거제개는 거제개의 잡종화 단계에서 생긴 주민들의
오해일 수도 있다..
나는 어이없는 조사의 수확에 기가 막혔다. 거제개의 유입 경로까지도 알아보자던 부푼 꿈은 문자 그대로 언감생심이었다.
나는 이 전화를 끝으로 더 이상의 전화 탐사는 물론
방문 조사를 단념했다,
행정조직이 동원해서 얻은 결과가 겨우 이 지경이라면 내가 어떻게
해본들 결과는 뻔할 것 같았다.
나는 다음날 허탕 치는 셈치고 제주도에도 거제도와 똑같은 방식으로
전화 탐사를 했다.
더욱이 이곳은 한번 시도를 해봤던 곳이어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점심 무렵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명견들을 망각해버리는 한국인들의 애견의식에 또 다시 좌절감 섞인 비애감을 느끼며 전화 조사를
중단해버렸다.
해보나마나 거제도와 같이 결과는 뻔 할 것 같았다.
27. 간장병과 역사 추리.
이렇게 해서 나의 조사 입증해줄 자료를 찾는 다고 시도했던 탐색은
단 삼 일만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밝혀 둘 일이 생겼다.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생각 했던 거제개나 진돗개의 실물 찾기 탐사가
시간이 지나자 의외로 뜻 밖의 성과 하나를 가져다 줬던 것이다.
제주개나 거제개의 자취를 찾다가 실패한 뒤에도 한참 동안 나의. 뇌리 속에는 검둥이였던 거제개가 불과 한 두 세대만에 망각되고 변형되어 흰둥이가 되어버린 한심한 사실이 떠나지를 않았다.
한국인에게 개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망각되기 쉬운 하찮은 존재인가를 되풀이해서 생각하다 보니 이와 반동적인 연상이랄까, 이상하게도 이 현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한 정보 하나가 점점 나의 같은 뇌리 속에서 크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 글 앞에서 잠깐 비친바 있다.
칠백 년이란 까마득하게 먼 옛날, 이제는 그 존재가 제주도에서 사라져
버린 몽골족이 기르던 개가 진돗개의 조상이라는 사실이 과연 어떻게
해서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왔단 것인지 그 연유가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궁금했었다..
장시간 머리 한 구석에 갖고 있었던 이 궁금증은 제주개나 거제개가
간단히 잊혀져 버린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갑자기 살아나
크게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궁금증으로 생긴 관심은 점점 나의 무의식을 그 쪽 방면의 조사 쪽으로
잡아 다니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자주 찾아오던 기적적인 행운이 이번에도 그 안개와 같이 희미한 미소를 보내왔다.
그 행운은 다소 엉뚱하지만 간장 병의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계절이 두어 번 바뀐 어느 날, 저녁 나는 직장 동료 두 명과 함께 속초의
작은 일식집에 가서 저녁을 같이 들 기회가 있었다.
저녁을 들면서 환담을 나누던 나는 우연히도 벽에 놓여 진
간장 병이 눈에 띄었다.
그 간장 병에는 한자로 몽고 간장이라는 이름이 써있었다.
흔히 수퍼나 일식집에서 볼 수 있었던 그 간장 병이 그날따라
달리 내 시선과 관심을 끈 것은 확실히 행운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술에 취한 두 동료가 나와 관계없는 화제로 입씨름을 하고 있는 사이 나는 그 간장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그것은 고려 때 고려와 몽골의 연합 함대가 일본 정벌의 발진을 한 합포, 즉 지금의 마산에 있는 한 샘에서 유래 한 것이었다.
원정 준비를 하던 몽골군들이 마셨다고 해서 몽고정[蒙古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샘물을 간장 양조에 사용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 간장은 구 십 년대 들어와 한 몽 수교가 된 뒤 몽골 메스컴에 크게 보도되어 몽골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알만큼 한 몽 친선에 큰 기여를 했다.
몽고 정에 갖는 몽골인들의 관심과 애정의 크기는 지금도 몽골 대사관에 걸려있는 이 우물의 그림이 말해준다.
단 몽골인들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깔보고 지었다는 경멸적인 몽고라는 이름보다 몽골이라는 자신들의 본래 이름이 이 우물에 붙여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나는 그 간장 병을 멍청히 바라보다가 마산이 남해안에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고 또 이어서 골머리를 앓게 한 제주 라이카와 몽골과의
인연을 떠올렸다.
나의 신경은 여기서 자동적으로 날카로워지면서 또 다른 사실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진돗개의 조상 찾기를 시작한 벽두부터 나에게 떼 놓을 수 없는 한
수수께끼가 계속 따라 다녔었다.
이 글을 처음부터 읽은 독자 여러분은 글의 앞머리에서 진도 현지에
몽골개가 진돗개의 조상이 몽골 개라는 설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는
사실이 소개된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좀체 믿기 어려웠다.
몽골군이 한반도를 유린하고 제주도를 제 땅으로 만들어 위세를 떨치던
때가 거의 칠백 년 전이고 제주도의 몽골 족들이 공민왕이 보낸
토벌군에 의해서 소멸 된지도 육백 년 전이다.
칠백 년 전이건 육백 년 전이건 우리 동물 연구가가 보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까마득한 옛날이다.
거제개 조사 실패 뒤 또 다시 좌절감과 비애감이 뒤섞인
감정으로 겪었지만 특정한 동물이 사라지고 불과 한 세대도
안 되면 그 동물은 그것의 연구를 위한 한 토막의 자료조차
구할 수 없이 완전히 잊혀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내가 손대 본 동물 연구 중 많은 수가 그랬었다
그런데 이 진돗개는 믿기 어려운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자신의 조상이
누구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
동물 연구에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하나의
불가사의임을 두말 할 나위 없이 인정 할 것이다.
그런 사전 지식이 있는 나는 도대체 일개 지방에 있는 우물이 길디 긴
세월동안 몽골인이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이 역시
신기하게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우물의 경우에는 이유를 간단히 추측 할 수가 있었다.
“ 몽고정이라-------?!”
나는 집에 돌아 와서까지 그 이름에 주목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다소
진부한 속담이 이 경우에는 나의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름은 입에서 입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전해지고 보존되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다.
그래서 한낱 지방의 한 우물이 칠 백년의 세월을 건너와 오늘날 후손들에게 몽골 인들이 사용했다는 사실을 전해줄 수 있다.
과연 그 것은 가능한 것인가?
동물 이름도 몽고정이라는 샘 이름처럼 길디긴 세월 동안 전해
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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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소개한 세종의 매사냥의 글을 참조해보자
몽골식 이름들이 지금은 망각의 지평선으로 가물가물 사라져 가는 매사냥의 한편에 화석처럼 붙어서 칠백 년의 세월을 끄덕없이 생존해왔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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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서 간장병을 더듬던 나의 탐색은 자연히 진돗개로
옮겨져 갔다.
“ 진돗개가 몽골개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은
몽골 개라는 이름을 가진 개가 진도에 들어와 그 이름을 대대로
전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간장이나 (매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왔다는 것은 진도로 건너와
진돗개의 조상이 된 제주 라이카가 진도에서는 몽골개라고 불리웠을
가능성을 한층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었다.
매의 사례를 바탕으로 라이카의 경우를 한번 추리해보자.
제주도와 남해안의 주민들은 매사냥의 경우와 같이 몽골인의 새로운
사냥 기술과 라이카를 열렬히 받아들였을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를 유린해버린 거친 정복민족이 금 쪽처럼 귀하게 여기던
이 라이카라는 사나운 개는 그 성능 이상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고 그 강한 인상은 지역민들로부터 몽고 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인기 상품은 또는 누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저절로 자신의
브랜드 네임을 갖기 마련이다.
이 인기 상품 라이카의 브랜드적 이름인 몽고개는 지역 문화에 깊이
각인되어 내려오면서 진돗개의 조상은 몽골에서 왔다는 정보를
세인들에게 인지시켜 주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것을 불가능해
보이는 시공의 장벽을 뚫고 지금의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것은 능히 추리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새로운 근거가 없는 한 위의 추리를 진돗개의 조상이
몽골에서 왔다는 사실이 긴 긴 세월 소멸되지 않고 전해 온 이유로서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고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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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다시 백두산 최 포수을 찾아본다.
그의 장년 때 그가 사는 내두산 촌에 먼 북쪽 내몽골에서 몽골인
두어 명이 개들을 데리고 원정 사냥을 온 일이 있었다.
그 개들 중에 사냥을 아주 잘 하는 개가 있어 실력에 반한 최 포수는 거금을 주고 그 개를 구입 했었다.
나는 그 개가 혹시 라이카인가 하고 물어 보았더니 라이카가 아니라
몽골 초원지대에서 많이 보이는 슬루키 계통이었든 듯 싶었다.
이 종류는 키가 크고 주력이 좋다.
그런데 최 포수는 이야기 내내 이 개를 몽고개, 몽고개라고 하며
부르는 것이었다.
위의 추리를 뒷받침 해줄 한 사례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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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