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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대한 잡설 4(펌)

수水 2011. 6. 2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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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검과 막야검은 춘추전국시대 오(吳)대의 검으로 중국의 고대10대명검의 두자리를 차지하는

명검중의 명검이다.
"합려내전(闔閭內傳)"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항주(절강성)의 서북쪽에 대나무숲과 폭포로 둘러싸인 깊은 산이 있었다.

그 산중에는 간장(干將) 막야(莫耶)라는 부부 도장공이 있었다. 오왕합려의 명을 받든 이들 부부 도장공은 오산의 철정(鐵精)과 육합(六合:天地 四方)의 금영(金英)을 캐내어 천지신명께 기도드린 뒤, 음양이 조화되고 신령이 강림한다는 시간을 기다린 최고의 조건 밑에서 칼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왕합려는 유난히 검을 좋아하는 제후로서 월왕구천과 함께 항주와 소주의 패권을 놓고 항상 다투었으며 월나라에는 중국제검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구야자가 있었다.

구야자(歐冶子)는 담로(湛盧), 거궐(巨闕), 승사(勝邪), 어장(魚腸), 순구(純鉤)를 만든 희대의 명장이었으며,사서에는 간장과 막야도 구야자의 제자라고 전해진다.-한서열전-)

   

 그러나 작업 도중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바람에 용로 안의 쇳물이 엉겨붙어 굳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도장공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일찍이 그들의 스승 구야자가 이럴 경우에는 어떤 조처를 취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준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의 몸을 던지면 쇳물은 다시 녹는다. 그게 싫으면 자신의 머리털을 자르고 손톱을 깎아 그것을 용로에 던진 뒤 동남동녀 800명이 교대로 풀무를 불게 하면 엉겨 붙었던 쇳물이 녹을 것이다!" 그때 구야자의 스승 부부는 몸을 던져 엉겨붙은 쇳물을 녹였고 그것을 만든 도장공이 구야자였으며 그 검이 곧 어장검이었다.

간장과 막야는 몸을 던질 수 없었기로 부인인 막야의 머리털과 손톱을 대신 집어넣고는 쇳물을 녹였다. 3년의 각고 끝에 드디어 자웅(雌雄)검 한쌍의 보검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칼들은 부부의 이름을 따서 '간장검'과 '막야검'이 되었다.

양(陽)의 간장검에는 거북 무늬가 새겨졌고, 음(陰)의 막야검에는 물결무늬를 새겼다.

간장은 칼을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아내 막야에게 말했다.

"웅검(雄劍)인 간장검은 숨겨두고 자검(雌劍)인 막야검만 왕에게 바치러 가오. 모르긴 해도 나는 집으로 돌아오기 어려울 거요. 당신은 임신중이니 혹시 아들을 낳거든 웅검(雄劍)인 간장검을 찾아 반드시 복수하도록 일러주시오. 간장검은 문을 나서서 남산을 바라보는 돌 위에 소나무가 서 있는 뒤쪽에 묻혀 있소."

   

간장이 바쳐올리는 자검을 받아 쥔 오왕은 몹시 기뻐했으며, 또 다른 명검을 만들지 못하도록 간장의 목을 베어버렸다.

    오왕합려가 간장검을 시험하기위해 돌을 내리쳐서 두조각났다는 전설을 간직한 시검석.

일성에는 미간척이 합려를 죽이기위해 내려친 검에 바위가 갈라졌다고 한다.

   

간장의 제 운명에 대한 예언은 적중했고, 부인 막야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미간척이라고 지었다. 두 눈썹 사이가 유난히 넓었기 때문이었다.

장성한 미간척은 모친으로부터 부친이 살해된 이야기를 듣고, 복수하기 위해 남산에서 웅검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 허탈해진 미간척은 대문간에 턱을 고이고 앉았다가 문득 깨달아 자기 집 주춧돌 밑에서 명검 간장검을 찾아내고 곧 복수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오왕은 꿈에서 복수에 불타는 미간척의 얼굴을 만난뒤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고, 미간척도 전국 곳곳에 나붙어 있는 현상붙은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숨어 도망다니는 수 밖에 없었다.

미간척은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노래에 담아 부르면서 울고 다니다가 호젓한 산속에서 자신의 목과 간장검을 주면 복수를 해준다는 사람을 만난다.

미간척은 순식간에 제 간장검을 빼서는 제 목을 쳤다. 그리고는 목과 검을 앞의 협객에게 내밀었다. 무너지지 않는 미간척의 동체를 바라보던 협객은 깜짝 놀랐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두 물건을 공손히 받았다. 오왕은 미간척의 목을 보자 몹시 만족해 했다. 천금의 현상금에다 융숭한 대접을 받던 협객은 왕에게 미간척의 목을 삶아 흔적조차 없앨 것을 간청했다. 그래서 미간척의 목을 사흘동안 계속 삶았다. 그런데도 목의 형상은 전연 풀어지지 않고 오히려 열탕 안에서 눈을 부릅뜬 채 불쑥불쑥 튀어나오려는 기세까지 보였다. 협객은 그 자리에서 잽싸게 간장검을 뽑아 왕의 목을 쳤다. 목은 열탕 안으로 툭 떨어졌다.

(사기(史記)에는 오왕합려는 월왕구천과의 전투에서 독화살을 손가락에 맞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구경하던 신하들이 비명을 질렀다. 협객 역시 간장검으로 제 목을 툭치니 목은 열탕 안으로 떨어졌다.

가마솥 안에서는 세 개의 머리통이 끓는 물에 곤두박질쳤다. 누구의 목인지도 모르게 세 개가 동시에 녹고 있었다. 그러나 해골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자 셋 중 하나는 어차피 대왕의 것이니 함께 장사지내고 같이 묻어, 이름을 삼왕묘(三王墓)라 부르자는 의견에 따라 같이 묻게 된다.

칼의 감정가로 당시에 이름을 떨쳤던 설촉은 특히 '순균검(純鈞劍)'의 가치를 값으로 따져 시(市)가 있는 두 고을과 준마 1천필, 그리고 1천호의 도시 두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고 했다.

   

오왕합려가 죽은후 그의 아들인 오왕부차는 생전 검을 좋아한 오왕합려를 위하여 합려의 무덤에

보검 3천자루와 함께 매장, 이곳이 바로 소주의 검지이다.

 

삼천개의 보검이 묻혀있다는 검지. 검지의 글은 도연명의 서체라 한다.

   

원래는 연못이 아니었으나 3천개의 보검이 탐이난 진시황이 보검을 구하기 위하여 합려의 무덤을

파헤치는데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타나 이를 물리친후 진시황마져 포기했다는 전설을 갖게되는데

파헤치다 만곳에 물이 고여 훗날 연못이 되었다는 전설을 갖게된다.

다른 전설에는 합려를 묻고난후 3일이 지난후 합려가 묻힌 언덕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주위를 모두

물리쳤다고 하는데 아뭏든 이러한 전설을 간직하여 이곳을 호구검지라 일컫게 된다.

   

   

   

추가설명 :  양(陽)의 간장에는 거북무늬가 새겨지고, 음(陰)의 막야에는 물결무늬가 새겨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