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설

일본의 가문에 대한 잡설 (펌)

수水 2011. 7. 15. 11:15

"이에'(家)와 친족집단"

권숙인


I. 서론: '이에'(家)의 정의

혈연에 의해 구성되는 인간관계, 예컨대 가족이나 친족은 흔히 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원리로 제시된다. 대개의 경우 개인은 한 가족의 성원으로 태어나서 그 안에서 초기사회화 과정을 보내고 보다 큰 사회와 관계를 형성해가는데, 여기서 혈연에 근거한 관계는 개인들의 조직 원리상, 그리고 준거의 기준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은 일본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장에서는 일본사회에서 '혈연'에 의해 구성되는 집단 혹은 조직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가장 기초적인 사회제도를 지칭하는 비교문화적 개념으로서 가족(family)에 해당하는 일본의 제도체는 '이에'(家)이다. 그러나 이에가 가지는 특수성은 우선 그 기초적 제도체로서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정의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는 일단 '공동의 가산(家産)에 기초하여 가업을 경영하는 집단으로서, 일상생활에서 거주와 생활을 공유하며 그 구체적인 성원의 생사를 초월하여 영속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해 두고자 한다.

이렇게 정의할 경우 이에는 비슷한 제도체를 지칭하는 기존의 통문화적 개념으로 쉽게 번역되지 않는다. 실제 일본의 학자들이나 서구의 학자들에 의해 일본의 이에는 '가족'(family), '가구'(household), '직계가족'(stem family) 등으로 번역되어져 왔는데 이것들은 앞으로 살펴볼 이유 때문에 모두 정확한 번역이라 할 수 없다. 보다 최근에는 통문화적 개념으로 번역하기보다는 '이에'(ie)라는 포크텀(folk term)을 그대로 쓰기도 하는데, 이 글에서는 '이에'라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입장을 취한다는 점을 밝혀둔다. 이는 무엇보다 이에가 갖는 특수성을 희석시키면서까지 번역하는 무리를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이란 개념은 역시 서구중심적인 혈연에 기초한 (핵)가족이란 뉘앙스가 강하고, '가구'라는 개념은 아무래도 이에의 영속성을 적절히 담아내지 못하며, '직계가족'은 이에가 갖는 비친족적 성격이나 정치, 경제적 측면을 담아내기엔 그리 적절치 않은 번역으로 여겨진다.

특히 한국에서는 일본의 가족·친족제도가 한국의 그것과 비슷하거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과 가정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예컨대 양쪽의 가족·친족제도는 모두 기본적으로 중국의 유교전통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부계적, 가부장적, 확대가족적 전통을 지니고 있고 그런 면에서 상당히 닮아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조금 더 깊이 그 구성원리나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분석해 보면 일본의 이에와 친족제도는 한국의 가족과 친족제도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일본의 이에와 친족제도가 한국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문화적 유사성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가정'은 일본의 이에와 친족제도의 특징을 가려버리고,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일본사회에서의 조직과 개인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이에와 기타 친족제도의 특징들을 특히 한국과의 비교하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나아가 일본의 이에와 친족제도의 특징들이 내포하는 문화적 함의, 예컨대 보다 광범위한 사회조직의 원리로 확대 적용되는 양상이라던가, 일본사회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조직원리로서 이에와 가족주의가 갖는 발견적 가능성 등을 몇가지 영역에 거쳐 고찰하고자 한다.



II. 이에의 특성('원형'으로서의 이에)

여기에서 논하는 이에의 특징은 '원형'으로서의 이에에 국한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나가노 다카시가 일본의 이에의 원형이 완성되어 존재하던 시기로 지적하는(中野 卓 1978) 근세이후부터 명치전기까지에 존재했던 이에의 특징들을 말한다. 이렇게 맥락을 한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첫째로는 하나의 제도로서 이에는 역사적으로 매우 상이한 모습으로 존재해왔다는 사실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원형'으로서의 이에의 기본적인 특성이 분명히 규명된 후에야 그것들의 변화나 지속의 양상과 원인, 혹은 현대일본사회에서 이에가 여전히 하나의 '원리' 혹은 '이념'으로서 기능하는 측면을 적절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혈연집단인가 아닌가?

1)혈연에 관련된 두개의 에피소드

한국인에게 있어 가족 혹은 친족이 혈연에 기초한 관계로 구성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가족 혹은 친족이 혈연집단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오히려 생소한 느낌마저 갖는다. 그러나 일본의 이에의 경우는 이 질문에 간단히 긍정하는 것이 가능치 않으며, 실제 일본의 이에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큰 논쟁점이 되어온 것의 하나가 이에 구성의 원리로서의 혈연관계, 혹은 친족관계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흔히 <아리가-기타노 논쟁>으로 불리는 유명한 논쟁의 핵심도 바로 이점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타노 세이찌는 이에 구성의 핵심적 요소로 (혈연에 의한) 핵가족 단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비혈연자를 이에 성원으로 간주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반면 아리가 기자에몽(有賀喜左衛門)은 이에를 기본적으로 하나의 생활집단으로 규정하며 비혈연자도 이에의 성원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혹은 가족의 멤버쉽과 혈연관계에 대한 한일간의 차이는 거의 '감각의 차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본질적이라 생각된다. 아래에 소개하는 두개의 에피소드는 필자가 각각 일본과 한국에서 접한 것으로 바로 이 '감각의 차이'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먼저 필자가 현지조사를 한 일본 후쿠시마현 아이즈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헤세무라라는 산촌에 살고 있는 은퇴한 전직 교사인 사이또씨는 슬하에 딸만 둘을 두고 있었다. 현재 두딸 모두 도시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사이또씨의 입장에선 딸들을 결혼시키기 전부터 집안 계승 문제가 신경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두 딸 모두 연애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딸들을 결혼시킬 때 고려될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우연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장녀의 남편은 그의 집안에서 차남인 사람이었고 이런 이유로 사이또씨는 혹시 그에게 집안을 계승시킬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이쪽에서 미리 꺼내면 혹시 딸네 부부에게 부담을 줄까 싶어 그냥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알아챘는지 2년전에 장녀 부부가 먼저 얘기를 꺼내며 큰 사위가 무꼬요시가 되겠노라고 하였다. 사이또씨 입장에서야 기다려 오던 바라 곧바로 수속을 밟아 사위를 무꼬요시로 들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다음에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사위는 이또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따라서 장녀는 결혼과 동시에 성이 사이또에서 이또로 바뀐 상태였다. 데릴사위 수속이 끝난후 장녀는 다니는 학교에서 동료 교사들에게 "내일부터 제 이름은 이또가 아니라 다시 사이또로 바뀝니다"라고 얘기를 하자 그들은 "이또 선생 이혼했어요?"라며 놀라워 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남편이 무꼬요시가 되기로 했다고 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사이또씨의 장녀 부부는 딸과 아들을 하나씩 두고 있었는데, 딸아이는 성이 이제 이또가 아니라 사이또로 바뀐다고 하자 "상관없다"고 한 반면 아들은 "나는 사이또보다 이또가 좋으니까 절대로 성을 바꾸지 않겠다"라고 해서 그게 조금 어려운 점이었다며 사이또씨는 흐믓하게 웃었다.

즉, 지금까지 <이또>라는 성을 사용했던 가족원 전체가 이제부터는 <사이또>씨로 성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姓)을 죽을 때까지, 실제론 죽은 후까지 가지고 가는 한국인들에게는 정말로 신기하게 보일 수 있는 것으로 이런 점에선 분명 감각의 차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친족관계를 변경하는 예가 거의 희박한, 그런 의미에서 엄격한 출계원리가 적용되는 한국의 경우와는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 그렇다면 혈연관계와 가족관계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각을 어떤 것일까? 실제 필자가 얼마 전에 한국에서 접한 또다른 에피소드는 위의 에피소드와 좋은 대조를 이루며 한국사람들의 가족·친족관념이 얼마나 철저하게 '혈연의 논리'에 집착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필자가 알고 지내는 50대의 한 부부는 아들과 딸을 각각 한명씩 두고 있는데 별로 좋은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일찌감치 '고교유학'을 보내 다행히도 둘다 미국의 명문 대학에 입학을 했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이제는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생긴 이 부부는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고아를 하나 데려다 잘 키워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 후 어느 수녀원을 통해 일곱살된 여자아이를 소개받아 양녀로 들이게 되었다. 그 사이 좀 복잡한 수속과정 등도 없지 않았으나 별 문제없이 모두 해결되었다. 그러나 딱 한가지 '문제거리'가 대두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편쪽의 집안, 특히 부친을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연세도 있고 또 생각이 완고하기 때문에, 자기자식이 있는데, 그것도 '번듯한' 아들까지 있는데 전혀 '남의 핏줄'을 '데려다' 키운다는 것은 분명 말도않된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 부부는 며칠간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기가막힌 해결책을 찾아냈다는 얘기였다. 그 완고한 노인을 설득시킬 묘안이란 무엇이었을까?
대답은 다름아니라 '혈연의 논리'였다. 부부는 부친을 찾아가 사실은 지금까지 '숨겨놓았던 자식'이 있었노라는 얘기를 했고 그 다음의 얘기는 한국인이라면 예상가능한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혈연의 논리' 란 '도덕성' (그것이 '혼외정사' 문제가 아니건 아니면 불쌍한 고아에 대한 애정의 문제가 아니건간에)의 문제도 그 앞에선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되며,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주변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름'을 바꾸는 경우는 있어도 성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접할 수 없다. 한국에서의 성은 곧바로 '혈연관계'의 지표이고 그렇기 때문에 생리학적인 혈연관계만큼이나 절대적이고 당연한 것이어서 어떤 사회적 요인에 의해 쉽게 다른 성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일본에서의 성은 '혈연관계'보다는 '이에'의 지표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예컨대 '사이또'라는 성을 쓰는 한 이에가 있을 경우 그 이에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은 누구가 陖건간에 그 이에에의 소속을 표시하는 '사이또'라는 성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일본 가정에 전화가 걸려오면 누가 전화를 받던간에 거의 항상 그 집의 성을 얘기하면서 전화를 받는데("네 사이또입니다" 식의), 이는 일본에서의 성은 일종의 "이에의 브랜드"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 할 수 있다.


2) 비친족원(혈연자)를 포함하는 방법들

'아리가-기타노' 논쟁으로 대표되듯이 일본의 이에에서 비친족원이 갖는 성격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친족원을 이에의 성원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에가 갖는 이러한 "초혈연성"을 비교문화적으로 일본의 이에가 갖는 가장 커다란 특성으로 지적한다. 예컨대 일본의 이에는 중국의 "쨔(家)"나 한국의 "가(家)"와 달리 멤버쉽의 경계가 매우 탄력적이어서 비친족원을 이에의 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흔히 농촌지역의 농가의 경우엔 머슴이나 소작인이, 도시 상가(商家)의 경우엔 입주점원(住潊奉公人)인들이 주인집 이에의 성원으로 포함되었다. 농촌의 경우에 대해선 아리가 기자에몽의 연구로 고전적인 사례가 된 이와떼현 이시가미 부락의 사이또 도조꾸(同族)의 예를 참고할 수 있다. 사이또 도조쿠의 경우(나카네 1967; 슈 1985에서 재인용) 아리가가 현지조사를 행한 1935년 당시 본가와 40개의 분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가의 경우 총 21명의 이에 성원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가장의 가족원 13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두명의 하인 가족(8명)이었다. 이들 하인들은 주인의 성을 따르며 주인의 대지 위에 집을 짓고 그 일상생활에 전인격적으로 참여하며 이에의 '경영'에 함께 봉사한다. 그리고 사후(死後)에는 그 이에의 친족적 성원과 같은 묘지에 묻혔다. 사이또 이에의 경우 직계의 이에 성원과 하인들 사이에서 뚜렷한 대우의 차이는 존재했으나 분명한 것은 이 하인들도 이에의 성원으로 궁극적으로 다른 직계성원처럼 분가를 받거나 그것이 기대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장기적으로 분가 가능성이 없는 하인들은 너무 나이가 들기 전에 그 집을 떠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리가가 연구한 또다른 동족인 나소동족의 경우엔 직계성원과 하인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나카네 1967: 141)

도시상가의 경우에 대해선 나카노 다카시가 분석한 교토의 사례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中野 卓 1978, 제4장 194-315쪽). 여기에서도 이에 구성원의 상당수가 비친족원들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나카노는 19세기 중반 교토시의 세곳의 호적을 분석하고 있는데 1831년에서 1868년 사이에 이 지역의 이에 구성을 보면 전체 이에성원 중에서 입주점원(住潊奉公人)이 차지하는 비율이 31%에서 4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개별 이에에 포함된 비친족적 성원은 대개는 한명에서 두명이지만 중대형 경영체를 운영하는 이에의 경우는 십 여명의 봉공인이 이에 성원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특정 시기에 특정 이에에 포함되는 비친족원의 수는 기본적으로 가업경영의 규모와 상황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공시적으로 보면 가업의 성쇠에 따라 봉공인 수가 변동하고 있다. 이는 해당 이에의 입장에서 보면 특정 시기에 가업의 규모에 맞는 노동력을 확보 해야 한다는 점과 이들 입주봉공인들을 (일부 방계 친족원의 경우처럼) 언제가는 분가시켜야 한다는 점과 관련되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이에의 경우엔 원래 친족적 이에 성원이었던 사람이 하인, 즉 비친족적 이에 성원으로 전환 되는 경우도 발견된다(윗글: 314-315). 어쨋든 이상의 방법에 의해 충원된 이에 성원은 "의제적(擬制的)" 이에 성원이 아니라 다른 친족적 이에 성원과 동등한 성원권을 가지며, 비친족원의 충원 자체도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인 관행이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3) 양자제도와 선조(先祖)

일본 이에의 "초혈연성"은 양자의 관행과 선조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뒤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입양은 일본의 경우 가계를 계승하는데 매우 보편적으로 시행되던(는) 관행이었다. 나아가 혈연과 무관히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즉 형식상으론 비록 '친족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지만(비혈연자를 입양할 경우도 입양된 사람이 일단 현재 가장의 '아들'로 위치 전환되어 가계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내용상으론 전혀 친족관계가 없는 사람이 이에의 핵심 구성원으로 포함되는 것이다. 이렇게 입양이 혈연과 무관히 이루어질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의 혈연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일본 관련 민족지에서 흔히 보고된다


(예컨대 문옥표 1994: 176-177). 예컨대 일본사회에 대한 초창기 민족지의 하나인 존 엠브리(John Embree)의 <스에무라>에서도 35세의 가장이 15세된 자신의 동생을 아들로 입적시키는 경우가 나타난다(Embree 1939: 83). 이에 대해 중국계 인류학자 프랜시스 슈(Francis Hsu)는 이와 같은 것은 "중국인에게는 용납할 수도 없는 것이며 친족체계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범법행위"로 간주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슈 1985: 58), 이는 혈연관계에 대한 중국(더불어 한국)과 일본의 기본적인 인식의 차이를 잘 드러내준다. 일본에 비해 한국의 경우는 양자를 들이는 것은 그 빈도 자체가 희박할 뿐더러 그 대상도 "異姓不養" 원칙에 의해, 그리고 철저하게 혈연상의 거리를 따져서 이루어진다. 즉 혈연자 중에서 촌수가 가장 가까운 자가 가장 선호된다.

조상의 문제를 봐도 이에의 비혈연적 성격이 분명해진다. 일본에서 조상은 한 개인의 출계상의 조상이 아니라 현재 소속되어 있는 '이에의 조상', 혹은 '먼저 간 이에의 성원들'을 지칭한다. 예컨대 위에 언급한 사이또동족의 경우 본가의 구성원이었던 두명의 하인 가족들은 주인 이에의 조상을 자신의 조상으로 숭배하며, 죽은 후에 다른 친족적 이에 성원들과 같은 묘지에 묻혔다. 즉 혈연관계가 없는 본가의 조상을 자신의 조상으로 섬겼으며 반대로 자신들의 사후에는 마찬가지로 혈연관계가 없는 다른 이에 구성원들의 조상이 된 셈이다. 경우에 따라선 집을 살 때 그 집에 딸린 '부쯔단'까지 물려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일본 이에의 조상이란 지극히 일반화된 개념으로서 조상숭배 의례도 개별적인 특정의 조상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반화된 이에의 선조에 대한 것으로서 우리와 같은 기제는 없다(문옥표 1994: 201).

이상의 특징들이 의미하는 바는 일본의 이에를 혈연집단, 특히 하나의 출계집단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본의 이에가 이념상으론 단계의 원리를 취하는 듯 보이나, 단계친족원리를 채택하고 있는 많은 다른 사회의 경우와 달리 이에의 성원을 충원하는데 있어서 출계(descent)란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출계란 성원충원을 위해 '가능한 여러가지 방법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Bachnik 1983; Befu 1971; Kitaoji 1971) 더불어 관념적으로는 혈연에 기초한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으나 실체에 있어서는 혈연관계를 크게 초월하는 구성원리를 갖는다. 나카노 다카시는 "이에는 가장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족 이외의 사람도 성원으로 포함하기도 하는데 이는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이에의 본질적 특성"(中野 卓 1978: 107)이라고 지적하는데 이 점은 인근의 중국이나 한국과 비교해서 일본 이에의 커다란 특징이다.


2. 계승의 원리: 장자상속(primogeniture)?, 부계(patrilineality)?

이에의 초혈연성과 관련된 쟁점으로 이에 계승 문제가 있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이에란 그 구체적인 성원의 생사를 초월하여 영속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집단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이에의 영속성이 어떻게 확보되는가, 즉 이에 계승의 원칙에 대해서도 적지않은 논의들이 있어왔다. 일반적인 관행에 비추어 볼 때 문옥표 교수의 다음의 지적은 실제 이에의 계승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한 이에의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한쌍의 계승자 부부가 확보되어야만 하며, 일반적으로 이들 중 한명은 그 집에서 태어난 자녀인데, 이 자녀는 아들이든 딸이든 관계가 없다. 그러나 자녀가 여러명 있을 경우 딸보다는 아들에게, 그리고 두번째, 세번째 아이보다는 첫번째 아이가 선호된다." (문옥표 1994: 75)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딸보다는 아들에게, 그리고 두번째, 세번째 아이보다는 첫번째 아이가 선호된다"는 측면, 즉 부계(patrilineality)의 원칙과 장자상속(primogeniture)의 원칙이 갖는 중요성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일반적으로 장남이 상속하는 것이 하나의 이상(ideal)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베푸(Befu 1963: 1330)가 인용한 고야마의 이차대전 후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농촌, 어촌, 산촌 주민들의 83.0%, 71.6%, 64.6%가 각각 장남의 계승을 선호한다고 답을 하고, 이들의 각각 67.3%, 71.9%, 73.5%가 가산에 대해 자식들간의 균등상속보다는 장남에 의한 단독상속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나카네 역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상속관행의 지역적 차이, 특히 동북 일본과 서남 일본 사이의 차이를 언급하면서도 일본 전체로 볼 때 일반적으로 장남이 상속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나카네 1967). 필자의 현지조사지에서도 현재의 가장들은 가능하면 장남이 이에를 계승했으면 좋겠다는 대답을 하고 있었고, 본인이 장남인 젊은이들은 여전히 가계계승의 도덕적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에의 계승관행은 맏아들 이외의 다른 아들이나, 장녀, 막내, 혹은 가족성원 이외의 사람에 의한 계승 등과 같이 부계와 장자상속의 원칙에 상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빈번하며, 많은 학자들의 관심도 실질적인 차원에서 계승자를 결정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었다(나카네 1967; Bachnik 1983). 예컨대 계승자를 결정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은 이에가 영속해야 한다는 점이 '어떻게' 계승되는가 보다 중요하다는 점(Bachnik 1983), 친족적 연속성 보다는 이에 자체의 번영이 중요하다는 점(Befu 1963), 혹은 출계율 보다는 이에에 대한 경제적 기여도가 이에 성원권에 핵심이라는 점(나카네 1967) 등이 중요하게 지적되어 왔다.

이는 이에의 계승이 매우 '실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엄격한 출계원칙에 의해 가계가 계승되는 한국의 경우에 비해 친자가 있느냐 없느냐가 이에의 계승에 훨씬 덜 치명적임을 의미한다. 우선 아들이 없을 경우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꼬요시'(데릴사위)를 들이는 것이다. 물론 일본사회에서도 "쌀겨(혹은 겉보리) 세홉만 있으면 무꼬요시로는 가지 마라"라는 말도 있으며 데릴사위에 대해 어느 정도 부정적인 편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실제 관행상 데릴사위를 들이는 것, 혹은 데릴사위로 가는 것은 굉장히 보편적이다. 또한 데릴사위로 보내는 집안이 반드시 빈한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식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장남에게 이에를 상속시키고 어짜피 분가시켜야할 다른 아들들에게 더욱 좋은 기회를 주기 위해 보다 좋은 집안에 상속자로 보내는 예도 많았으며, 실제 부유한 가정의 아들들도 무꼬요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아들은 물론 딸도 없을 경우엔 양자를 들일 수가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한국이나 중국과 비교해서 일본의 양자관행이 갖는 특징은 가계계승을 위해 입양이 굉장히 보편적으로 행해지며 나아가 혈연과 무관히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문옥표 교수의 사례에서 보면 양자를 들이는데는 반드시 남아선호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그녀의 현지 조사지 에선 여자아이를 입양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나아가 그 대상도 자신의 친형제나 자매를 양자로 들이는 경우도 가능해서 부부중 남편의 동생을 양자로 들인다던지, 데릴사위를 들여 결혼을 했던 한 여자가 자손이 없자 자신의 여동생을 양녀로 들인 다음 다시 데릴사위혼을 시키는 경우, 혹은 아예 결혼한 남녀 한 쌍을 입양하는 경우(이는 夫婦養子라 불린다)도 나타난다(문옥표 1994: 176-177). 나아가 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제쳐두고'(Bachnik 1983) 양자를 들이거나 서양자를 들이는 경우도 빈번하게 보고되어져왔다.

그리고 이런 관행은 비단 오래전 과거의 일이 아니라 최근까지도 흔히 관찰되는 관행으로 필자자신의 현지조사 중에서도 實子를 제쳐두고 양자를 들여 이에를 계승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세간에 잘 알려진 예 중의 하나가 기시 노브스케(岸信介) 전 수상과 사또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수상의 경우이다. 이 두사람은 야마구찌 현의 사토 집안에 각각 차남(기시 노브스케)과 삼남(사토 에이사쿠)으로 태어난 친형제였다. 여기서 차남이었던 기시 노브스케는 기시 집안의 양자가 되어서 차후 기시 집안의 아들이자 상속자가 된 것이다. 기시 노브스케의 친가(사또家)의 맏형은 해군 중장을 지낸 사람인 것을 보면 양자로 가는 것이 한국에서 생각하는 식으로 강한 편견의 대상이거나 상대적으로 '빈한한' 집에서 보내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쨋든 위에 언급된 모든 관행은 연구자들이나 해당 이에 성원들에 의해 '예외'가 아니라 합당한(legitimate) 계승방식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볼때 흔히 말해지는 '부계원칙(patrilineality)', '장자상속의 원칙 (primogeniture)' 이란 것도 메이지유신 이후에 하나의 원칙 혹은 모델로 유포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지역에 따라 혹은 개별 이에의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다양한 가계 계승관행이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경우 이에의 계승자를 선택하는데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던 것은 출계보다는 이에 자체의 번영과 영속성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3. 친족집단인가 경영체인가?

이에가 갖는 또다른 특징은 이에의 성원들이 동일한 경제행위(가업)에 종사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대로 일본의 학자들 중에서 기타노세이찌 등은 일본의 이에를 기본적으로 혈연에 기초한 친족집단으로 파악하고, 통문화적인 가족(family)의 일본적 형태를 이에라고 하였으나 아리가 기자에몽 이후의 일본 사회학자·인류학자들은 하나의 경영공동체, 혹은 생활공동체로서의 이에의 특징에 주목하여 왔다. 특히 이점은 아리가 기자에몽 이후 나카네 지에와 나카노 다카시의 논의를 통해 일본 이에의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되어져 왔다. 즉 한 이에의 성원은 동일한 경영체(corporate)의 구성원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이에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분할불가능한 단위이었다. 따라서 이에를 계승한 자의 중요한 역할은 가산을 유지, 운영하며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베푸도 이에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경제적인 것임과, 이에에 대한 성원권이 친족관계를 통해서라기 보다는 이에의 경제적 활동에 대한 기여도 여부에 의해 정해진다는 점을 들어 "엄격한 의미에서 이에란 친족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경제적 조직체"라고 정의하고 있다(Befu 1971: 39). 따라서 앞서 살펴본 가계 계승상의 유연성이란 이에가 단순한 친족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경영공동체로서의 성격이 강한데서 오는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친족집단에서 계승의 절대조건으로 중요한 출자관계가 경영체의 경영능력이라는 현실적인 고려 앞에서는 그 중요성이 약화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이에의 지속성이 유지되는 것이 특정 이에의 경제적 상황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이에의 지속성은 이에의 직업(가업)이 있는 경우나 혹은 이에의 토지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현대화된 맥락에서도 마찬가지로서 경제적 상황이 바뀜에 따라 이에의 지속성 양태가 달리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헨드리가 연구한 큐수의 국화, 차 재배 농가의 경우처럼 충분한 소득이 보장되는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의 경우((Hendry 1995)나 문옥표 교수가 연구한 스키리조트 지역의 민박의 경우(Moon 1986)는 상대적으로 이에 연속성이 확보되거나 회복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필자가 현지조사를 한 아이즈 지역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최근에 꽃재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한 산촌의 경우 이 작물재배를 통해 이에의 연속성이 확보되거나 후계자를 확보하는데 훨씬 입지가 강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관련해서 소위 '몇대(代)에 걸쳐 계승되어 온 일본의 가업(家業)'에 대한 한국에서의 소개방식, 이해방식의 방향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의 문제, 즉 계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는 가업을 이어야하겠다는 도덕적 의무감과 철저한 직업의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의 경영체로서의 이에의 속성에서 결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12대째 지속되어온 가업'이라고 할 경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이 반드시 한국에서 처럼 자식이 [경우에 따라선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효'의 일종으로 부모의 일을 이어받고, 그의 자식이 또 부모의 일을 이어받는 식이 아니라 이에라는 '경영체'가 그 경제조직의 존속을 위하여 최선의 선택과 선별과정
을 거친 결과일 수가 있는 것이다. 12대에 이르는 계승자 중에는 계보상 그 집안의 자식이 아닌 사람이 포함된 경우가 있을 수 있음도 물론이다.



III. 이에를 넘어서는 친족: 도조쿠(同族)와 신루이(親類)

일본사회에서 개별 이에의 범위를 초월하는 친족을 지칭하는 명칭은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친척'이라는 표준어에 해당하는 명칭으로는 신루이, 엔루이, 마끼, 잇케, 카부, 이토코, 오야코, 도조쿠, 잇토우, 하로우지, 신루이마끼, 오야구마끼, 지루이, 에도오시 등의 용어가 지역에 따라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鳥越 1993: 45). 이런 다양한 포크텀은 각기 상이한 뉘앙스를 갖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동일한 포크텀이 반드시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잇케를 '신루이'라는 의미로 쓰는 지방이 있는가 하면 '도조쿠'의 의미로 쓰는 지방도 있다(윗글: 46). 이런 현실이지만 일본의 농촌사회학에서는 일본의 친족조직을 크게 두종류의 조직으로 나누어 설명해 왔다. 도조쿠와 신루이가 바로 그것이다.



1. 도조쿠(同族)

1) 혼께(本家)와 분께(分家)로 구성되는 이에연합체

도조쿠의 구성상의 특징은 그 구성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이에라는 점이다. 도조쿠는 '혼께-분께'의 관계로 연결되는 이에연합체로 정의가 가능하다. 이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도조쿠 집단은 비친족적 요인도 포함하며 이는 특히 아리가 기자에몽 이후의 일본의 도조쿠조직의 연구에서 동족 조직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여겨져 왔다. 도조쿠이 '이에연합체'라는 점과 그것이 갖는 비친족적 성격은 분께가 형성되는 다양한 방식을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베푸(Befu 1963: 57-58)는 분께가 세워지는 대표적인 예를 다음과 같이 예시하고 있다. 어느 농촌지역의 한 이에를 가정해보자. 그 집(A)의 장남은 그 이에를 계승하고 나머지 아들들은 그 집을 떠나게 된다. 이 때 그 집의 재산이 여유가 있으면 작은 아들에게도 집을 지어주고 약간의 토지와 가구, 식량, 농기구 등을 나눠주고 같은 마을에 살게할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작은 아들의 집은 이때 나눠받은 토지만으론 생계가 부족하기 때문에 A의 농지를 소작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A에 의존해서 살아가게 된다. 이 경우 A는 이 작은 아들의 집(B)에 대해 혼께가 되고 B는 분께가 된다. 또다른 방식으로 A는 딸중의 하나에게 데릴사위를 들여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도움을 제공하고 분께(C)을 세워줄 수 있다. 혹은 분께(예컨대 B)의 아들 중의 하나가 혼께(A)의 일꾼으로 들어와서 십년 혹은 이십년 일을 한 뒤에 분께(D)를 세워 나갈 수 있다. 이 경우 주의해야 할 것은 D는 자신이 태어난 집(B)의 분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분께로 세워준 A의 분께가 된다는 점이다. 또다른 경우로 전혀 친족관계가 없는 경우도 분께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A가에서 오랬동안 머슴이나 일꾼으로 일을 한 사람 중에서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경우도 위와 같은 절차에 의해서 A의 분께(E)가 되어 도조쿠집단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비 친족원으로서 E의 경우처럼 혼께에서 오랜 기간 봉사를 하지 않은 경우라도 분께가 될 수 있는데, 예컨대 마을로 새로 입주해 들어와 A의 분께가 되어 정착하는 집(F)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혼께인 A를 정점으로 해서 나머지 분께들인 B, C, D, E, F가 하나의 도조쿠조직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도조쿠조직은 개인의 혈연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출계집단이 아니라 개별 이에들간의 관계로 이루어진다는데 비교문화적인 특징이 있다. 한국의 경우 친족조직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성원이 될 수 있으며 일단 성원이 된 자들은 지속적으로, 영원히 친족원으로 남게된다. 더불어 엄격한 출계순서에 따라 소위 큰집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 큰집으로 남게되는 데 이점도 일본의 도조쿠와는 매우 다른 점이다. 이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도조쿠조직은 부계적 친족집단과 깊은 관련이 있고 이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부계혈연집단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2) 도조쿠의 특징

이렇게 구성되는 도조쿠조직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혼께-분께 사이의 계보관계; 둘째, 혼께-분께 사이의 위계적 구조; 세째, 이 위계관계를 지탱하는 혼께-분께 사이의 경제적 관계; 네째, 하나의 생활단위로서 지연적 의미를 강하게 갖는다는 점이다.

혼께와 분께 사이의 계보관계는 "이에간의 본말(本末)의 계보(系譜) 관계"(中野 1978: 54)를 의미하는 것으로 반드시 혈연적 관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즉 위에 가정으로 예시한 A, B, C, D, E, F의 경우에서 처럼 하나의 도조꾸을 구성하는 이에와 이에들이 각자 어떤 계통에 의해 연유했는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D나 F의 경우에서 처럼 이것이 반드시 혈연적/개인적 계보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조꾸을 구성하는 이에들 사이에는 어느 이에가 다른 이에로부터 분기해 나왔는가 하는 이에들의 창설의 유래가 인식되고 있으며 이러한 계보인식에 의해 혼께-분께 사이에서는 물론, 분께 사이에서도 서열관계가 형성된다. 위의 예의 경우 A는 이 도조꾸조직의 시조(始祖)家로 인식되며 분께들 사이에서도 분께 창설의 계통에 위해 상하관계가 인식된다.

도조꾸을 구성하는 혼께와 분께 사이에는 엄격한 위계적 관계가 존재한다. 이 위계관계는 방금 살펴본 것처럼 혼께가 계보상으로 다른 모든 분께의 시조가 된다는 점에서도 연유하지만 그와 동시에 혼께가 지니는 월등한 경제력 때문이기도 하다. 이상적으로 혼께는 (농업, 어업, 혹은 상업) 경영의 주체이며 이에 대해서 분께는 노동력을 제공하며 의존관계를 형성한다. 농촌지역의 경우 혼께는 안정된 농업경영체인 반면 분께들은 대개가 생존을 위해서 혼께의 농업경영에 의존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실제적으로 혼께는 대개 혼께지주의 형태로 존재하며, 분께는 분께소작이거나 일꾼으로 혼께의 농업경영에 참여한다. 어촌의 경우라면 혼께가 어망이나 어선 등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그런 자본을 갖지 못한 이에가 분께가 되는 식이다. 상가(商家)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혼께는 대개 성공적인 가게를 운영하고 분께는 이 가게의 분점을 운영하거나 아니면 출퇴근 직원으로 혼께의 상업에 의존한다. 즉 도조꾸조직도 이에처럼 하나의 경영체로 간주할 수 있다. 나아가 혼께는 경제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례적 차원에서도 분께를 지배하게 된다.

예컨대 농촌의 분께 구성원들은 혼께의 여러가지 농사일 뿐만 아니라 의례나 다른 행사가 있을 경우 무상의 노동력을 제공할 것이 기대되어진다. 반면 혼께는 분께에 대해 "비호적인" 역할을 할 것이 기대된다. 분께가 곤경에 처했을 경우 경제적 원조를 해주고, 결혼식, 장례식 등을 비롯한 각종의 의례에서도 보호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도조꾸이 갖는 경영공동체로서의 특성은 분께를 창설하는 방식과 근거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혼께를 계승하는 자식(대개 장남) 이외의 차·삼남은 기계적으로 분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혼께 경영의 발전에 맞추어서 분께가 창설된다. 따라서 혼께경영이 발전가능성이 없으면 차·삼남이더라도 분께를 세우지 않고, 반대로 혼께경영이 발전 국면에 있으면 입주봉공인이 분께를 세우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점은 나카노가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근거로 세밀하게 분석을 하고 있는 교토상가의 경우(中野 卓 1978: 194-315)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혼께가 별로 경제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 혹은 일상생활상의 협동의 필요성이 상실될 경우 분께의 입장에서는 혼께에 별로 의존할 필요성이 없게 되므로 도조꾸조직은 훨씬 느슨한 이에 연합체의 형태를 띄게 된다. 이럴 경우 같은 도조꾸에 속한 이에들이 공동으로 행하는 것은 도조꾸의 공통 시조에 대한 제사를 함께 지내는 것에 국한되어서 같은 도조꾸구성원의 의미도 관념적이고 의례적인 것에 머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카네 지에는 도조꾸조직을 '지역적 협동집단'이라고 부르고 있으며(나카네 1967), 같은 맥락에서 그녀는 도조꾸의 존재 양태에서 보이는 다양성을 경제적 배경의 차이로 설명한다. 즉 강력하고 효율적인 도조꾸은 주로 경제가 한정된 자원에 직접 의존하는 부락, 그리고 주민이 다른 경제활동을 할 기회가 적고, 내적으로 부락 주민들 사이에 상당한 경제적 격차가 있는 곳에서 발달한다. 반면 가난한 산촌이나 극히 한정된 공동자원을 가진 영세한 부락에서는 몇몇 구성원이 부를 축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구성원간에 부의 격차도 크지 않으므로 도조꾸조직이 형성되지 않거나 있더라도 극히 약한 기능만을 한다는 것이다 (윗글: 152-153). 도조꾸이 성립되는 조건과 그 규모의 확대와 축소를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의해 논의하고 있는 사사키의 분석도 마찬가지로, 일본의 도조꾸이 어떤 초역사적인 친족조직이라기 보다는 주어진 조건, 특히 경제적 배경에 의해서 그 존립에 큰 영향을 받는 조직체임을 보여주고 있다(佐佐木 1987).

도조꾸가 경제적 협동을 포함한 일상생활상의 협동관계에 근거해 형성된다는 점은 도조꾸조직의 네번째 특징, 즉 지리적 인접성과 연결된다. 대개 농촌의 도조꾸은 한 부락내에, 그것도 특정 지역을 점유하는 이웃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대로 분께의 토지나 대지가 대부분 혼께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도조꾸을 구성하는 한 이에가 그 지역을 떠나게 되면 그 집은 도조꾸조직이 수행하는 각종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실질적으로 도조꾸구성원으로서의 의미를 점점 상실하게 된다. 도조꾸은 본질적으로 지역집단으로 그 기능은 한 부락내로 국한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일본의 도조꾸조직이 한국의
동족(문중)조직처럼 전국에 걸친 조직으로 발전해 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현재는 더이상 이런 본래 의미의 경제적 근거에 기초한 경영체로서의 도조쿠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특히 농촌의 경우 이차대전후의 농지개혁은 농가도조꾸의 혼께가 소유했던 광대한 농지와 소작제도를 소멸시켰고, 도시지역에서는 근대적 경영제도와 임금제도의 도입, 공식적인 직업교육의 도입 등에 의해 도시 도조꾸단이 존재의 위기를 겪게 된다(中野 1978: 124-144). 더불어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인구의 급격한 이동은 지연성에 근거한 도조꾸조직의 기반을 소멸시켜왔고, 소위 "샐러리맨화"로 표현되는 생계경제상의 급격한 변화는 과거와 같이 자원의 독점적 소유에 근거한 혼께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는 도조꾸조직의 정치 경제적 기능은 거의 상실되었고 시조제사와 같은 의례적 기능만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신루이(親類)

신루이란 우선 비교문화적 개념인 '개인적 친속'(personal kindred)의 일본적 형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석적 개념으로서 친속(親屬)이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부계와 모계 양쪽으로 연결되는 일정 범위 내의 친족원(ego-centered bilateral kin)을 지칭한다(Freedman 1961: Befu 1963). 한국의 포크텀에서 모계인지 부계인지와 상관없이 일정한 친족적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친척'이란 용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조쿠는 이에들간의 계보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조직이다. 그리고 이 때 말하는 '이에들간의 계보관계'라는 것은 반드시 그 구성원 개인들간의 친족적 계보관계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 통문화적으로 봤을 때 일본의 도조쿠가 갖는 특징적인 모습임을 살펴보았다. 반면 신루이는 기본적으로 그 구성원의 친족 관계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도조쿠와 구분된다. 예를 들어 어느 한 분께가 혼께로 부터 봉공인분께를 했을 경우에 이 양 이에는 서로 같은 도조쿠를 구성하지만 신루이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신루이의 범위는 도조쿠의 범위와 많이 겹치지만 필연적으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보다 정확히는 동일한 도조쿠의 성원일 경우 신루이를 정확히 공유하는 사람은 친형제밖에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신루이는 경계가 분명한 하나의 조직이나 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보다는 하나의 친족범주, 혹은 관계를 의미한다고 하겠으며, 이점도 신루이가 도조쿠와 분명히 구분되는 측면이다.

신루이는 그 관계의 영속성이란 면에서도 도조쿠와 차이를 보인다. 도조쿠의 경우 공통의 조상을 출발점으로 [부계적] 계보관계에 의해 구성되므로 한번 도조쿠의 구성원이 된 이에는 논리적으로 영원히 구성원으로 남는 반면에 신루이는 특정 친족원의 사망이나 이혼 등의 이유로 기존의 신루이 관계가 쉽사리 소멸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통상 신루이의 범위가 4촌까지라고 할 경우 자기를 중심으로 볼 때 아버지의 4촌에 해당하는 신루이는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 더이상 자기집과 신루이 관계를 갖지 않게 된다. 달리말하면 신루이는 도조쿠 처럼 하나의 법인체적단위(corporate unit)는 될 수 없다. 나아가 신루이 관계는 도조쿠의 비호종속적 위계관계와는 달리 원칙적으로 대등한 교제와 연휴로 맺어진다는 점에서도 도조쿠와 구분된다.

그러면 일본인들의 구체적인 생활에 있어서 신루이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기능을 할까? 베푸는 일본사회에서 신루이가 담당하는 기능을 크게 세가지 종류로 나눈다(Befu 1963: 1332-1333). 첫번째가 경제적 원조로 예를 들어 주택의 신축, 지붕교체, 모내기 등을 포함한 농사일 등에서 양계적 친속원들이 동원된다. 두번째로는 출생, 혼인, 사망 등의 중요한 통과의례에서 행하는 상호협동과 부조기능이다. 특히 혼인식이나 장례식에는 도조쿠의 성원이 행하는 역할과는 별도로 신루이 성원들이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들이 있다. 신루이가 행하는 세번째 기능은 설날이나 오봉과 같이 연중 중요한 계기에 상호방문을 하고 선물을 교환하는 것이다. 도식적으로 도조쿠가 행하는 기능이 그 친족집단의 이름을 전승하고 가업을 유지·계승하는 것이라면, 신루이 관계는 보다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상호원조와 교제관계로 맺어진다고 할 수 있다.



IV. 변이: 일본의 이에·친족조직의 역사적·지역적·직업적 변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 논의에서 말하는 이에나 도조쿠 등의 친족조직은 그 '원형적 형태'의 친족조직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렇게 맥락을 한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특히 일본의 친족조직이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 '원형'과는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1. 역사적 변화와 변이

나카노는 일본의 이에와 도조쿠가 '원형적' 형태로 존재하던 시기를 근세, 즉 도쿠가와 시기로 부터 메이지 전기까지로 잡는다(中野 1983). 즉, 여기에서 논하는 이에와 도조쿠 조직은 역사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는 얘기다. 이점과 관련해 중요하게 지적되는 것은 메이지 민법에 의해 초래된 변화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본격적인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전면적인 사회적, 제도적 개혁을 단행해 갔으며, 이에제도도 그 대상의 하나였다. 특히 기존의 이에제도를 재정비하고 규정하는데 직접 영향을 끼친 것이 메이지 31년(1898)의 메이지 민법(明治民法)이다.

메이지 민법상의 이에는 동일한 '이에', '도조쿠' 등의 명칭을 쓰고 있으나 지금까지 살펴본 이에와는 구분되는 의미에서 오히려 '가족(family)'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비친족원이 이에의 성원이 되는 것은 금지되었고, 도조꾸적 이에 연합의 경우도 혈족적 이에 사이의 결합으로 국한되어 졌다. 이러한 규정은 당시 엘리트들의 유교적이고 무사적인 가족관을 표준화시킨 것이며 더불어 서구의 "가족" 관념의 도입에 의해 영향받은 것이기도 하였다.

나아가 메이지 민법은 가장권이나 후사, 상속 등과 관련해서도 근세 武家的 가족제도를 이에제도의 표준형으로 일반화시켰다. 예컨대 그 이전 시대의 서민들의 관행은 각각의 이에의 존속과 번영이란 지상목표를 위해서 그 지역적 현실이나 가업의 조건에 의해 상속이나 가계 계승과 관련해 여러 다양한 관행을 행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메이지 민법은 장남단독 상속만을 합법화시켰다. 더불어 이에내의 의사결정권과 관련해 가장의 절대적 권력을 인정하면서 강력한 가부장제에 기초한 가족제도에 합법적인 기초를 마련하였다. 도쿠가와 시대의 무사층의 이에나 메이지 민법상의 이에, 강력한 가부장권에 기초한 이에는 일본사 전체를 통해볼 때 특수한 파생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본 가족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동의하는 점이다.(川島 1973; 中野 1978; 村上 外 1979).

가족제도와 관련된 법적 규정이 또다시 크게 변화게 된 것은 이차대전후이다. 점령하의 신헌법(1946)은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법률상의 보호를 차단하고, 모든 가족원의 평등에 기초한 근대적 가족집단의 권리 의무 관계를 법적으로 마련하였다. 예컨대 상속에 있어서 장남의 우위를 배제하고 성별간 평등을 제도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과거의 이에 이념이나 여성에 대한 불이익이 지속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법적 제도만이 일본의 가(족)·친족제도에 변이를 초래한 것은 아니다. 전반적인 사회적 환경이 변함에 따라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서 이에나 도조쿠는 그 존재형태나 기능을 달리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나카노(中野 1978: 124-144)는 미쯔이가의 사례를 통해 원형적인 상가 도조쿠조직이 변모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상가도조쿠의 경우 이에의 변용이 완성, 보급된 것은 메이지 중반 이후의 일이다. 이때쯤 되면 이에경영체를 둘러싼 경제적 환경이 변화하고(경영규모의 확대, 근대적인 직업교육, 근대적 고용관행의 전파, 새로운 가족이념 도입 등등..) 결과적으로 이에와 경영이 분리되게 된다. 즉 이에 내부에 봉공인을 포함하거나 봉공인을 분께시켜 도조쿠 조직안에 흡수시키는 관행이 없어지면서 이제 이에는 곧 통문화적 의미의 가족(family)과 일치하게 된다. 도조쿠 조직의 경우도 일종의 부계적 친족단체와 일치하게 된다. 즉 이쯤이면 영어의 family나 patrilineal lineage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형태를 띄우게 된 셈이다. 이것은 비단 도시의 상가 도조쿠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과거 원형적 이에가 강력하게 존재해왔던 농촌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 지역적 변이와 직업적 변이

지역적 변이와 관련해서 흔히 지적되는 것은 동북일본과 서남일본 사이의 차이이다. 도식적으로 말해 동북일본은 단독상속, 대규모의 도조쿠 조직, 위계적 조직으로 혼께와 분께간, 혹은 분께간에 서열이 엄격한 반면, 서남일본의 경우는 분할상속, 규모가 작은 도조쿠 조직, 본분께사이의 위계가 덜 엄격하거나 서열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제시된다. 가장권의 상속과 관련해서도 방금 고찰한 것처럼 장남에 의한 가계계승이 합법적인 것으로 된 것은 메이지 민법에 이르러서였고, 그 이전 시대의 서민들의 관행은 지역적 현실이나 가업의 조건에 의해 가계 계승과 관련해 다양한 관행을 행하고 있었다. 예컨대, 명치전반기까지는 동북지역과 북관동(北關東) 지역의 경우는 장자(長子)계승이, 반면 일본의 남서부와 중부 지역엔 말자(末子)계승이 지배적인 형식이었던 것으로 말해진다. 장자계승의 경우 다시 장자, 즉 첫번째로 태어나는 아들이 계승하는 형식과 아이의 성(性)에 상관없이 첫아이가 계승하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 보다 분명히 "初生子상속"이라고도 한다. 이 경우 첫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여자일 경우, 차후에 비록 아들이 태어나더라도, 그 장녀가 가장권을 상속하게 되며 이런 형태를 특별히 '아네가도쿠'(姉家督)상속이라 칭한다.

이러한 점들은 일본 전역에 걸처 상속이나 가계 계승과 관련해 지역에 따라, 혹은 개별가구에 따라 얼마나 폭넓은 변이와 선택의 폭이 존재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아직 근대국가에 의한 통합이 시도되기 이전에 존재가능하였던 폭넓은 지역적 관습의 차이와 다양한 관행들이 메이지 유신 이후 붕괴되고 점차 장남상속으로 표준화되어 간 것은 살펴본대로이다.

혼인의 경우에도 흔히 중매결혼, 부거제(夫居制), 노동결혼(아내가 남편의 가족집단에서 일정기간 노동을 한 뒤에야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지위가 주어짐)을 일본의 지배적인 결혼유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런 혼인관행은 명치 이후 유교적 가부장제의 확산과 더불어 확산된 것으로 해석된다. 명치중기나 말기까지만 해도 이런 지배적인 유형과 대치되는 형태, 즉 자유결혼, 처음엔 남편이 아내집에 거주하다가(妻訪い婚: 아내방문혼인) 차후에 아내가 남편 집으로 옮겨가는 형식, 남편가족의 일원으로 지위를 얻는데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유형이 전국에 걸쳐 많은 농촌에도 존재했었다고 한다(川島 1973: 257). 현재 이런 혼인유형은 주로 주변부 지역, 특히 일부 어촌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흔히 일본의 가족·친족제도를 얘기할 때 농촌이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할 경우, 혹은 어느 특정지역의 관행을 일본 전 지역의 전통으로 일반화시킬 경우 커다란 오류를 범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직업적 변이와 관련해서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업종에 따라 가업계승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으로, 예컨대 여관이나 찻집을 운영하는 이에는 모계 계승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Brown 1966; 中野 1978) 농업을 하는 이에의 경우는 부계 계승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위에서 고찰한 '원형'으로서의 일본의 이에, 도조쿠 자체도 실제 현실과 결부해서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V. 유사 친족제도와 가족 이데올로기

이에·친족제도 그 자체는 현실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어온 반면에 이 제도를 뒷바침하는 원칙들은 종종 사회의 다른 영역에 침투하여 하나의 강력한 모델로 기능하였고, 아직도 여전히 하나의 모델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산업화와 함께 전통사회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던 이에와 도조쿠가 존재 기반을 많이 상실해 왔지만, 여전히 하나의 원리로서 이에의 원리와 이념은 공장, 회사, 학교, 지식인집단, 정당 등의 근대적 조직에서 지속되고 있다.


1. 오야꼬관계(親子關係)

오야꼬 관계란 일종의 제도화된 유사 친족관계로 위에서 고찰한 일본 친족관계의 몇몇 특징들에 근거해 성립된다. 즉 오야붕(親分)이라 불리는 한명의 보호자/후견인 아래 피보호자인 꼬붕(子分)이 상하위계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오야붕이 보호와 원조를 하는 대신 꼬붕은 충성과 봉사를 한다.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관계는 부모-자식(親子)이라는 친족호칭을 사용하며 실제 부모 자식관계가 한없는 은혜받음과 갚음으로 개념화되는 것처럼 은혜(恩: 온)이라는 개념을 축으로 관계가 형성된다는 면에서도 하나의 유사친족(fictive kinship) 관계라 하겠다. 이런 관계는 한 개인과 다른 개인 사이에 형성되어서 출생, 성인식, 혼인 등에서 후견인 노릇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수의 이에가 하나의 유사 친족조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Befu 1963: 63).

후자의 경우는 그 조직이나 기능, 이념 등에서 상기한 도조쿠 조직과 매우 유사함을 보인다. 특히 대개가 부유하고 권위있는 이에와 빈한한 이에 사이에 성립하는 까닭에 주인의 도조쿠 조직에 흡수되어버린 하인이나 소작인 가구들의 관계와 유사하고 실제로도 도조쿠 조직과 겹치는 경우도 많지만, 오야꼬관계란 기본적으로 도조쿠에서 보이는 이에간의 영속적 관계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자유로이 성립하는 차이점이 있다. 더불어 흔히 이에간의 관계로 표현되나 그 자손에게 까지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도조쿠 조직과는 다른 점이다. 오야꼬 관계에 의한 정치 경제적 보호와 후견 관계는 특히 전통적 촌락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나아가 현대화된 맥락에서도 다양한 개인간의 지배·종속관계에 작용하는 원리로 남아있는데, 예컨대 부두의 육체노동자 집단, 갱단(야꾸자), 거리 노점상 집단, 광부들 사이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오야꼬 관계에 의한 보호와 복종 관계는 구성원들에게 유대감을 제공하고 사회에 대한 나름대로 효과적인 적응 수단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그것 못지 않게 내외적인 폐해도 지적된다. 예를들어 광산 노동자들이나 지하조직의 경우 이런 유사친족 집단이 그 직종에 관련된 일을 독점한다. 따라서 어느 한 멤버가 오야붕을 납득시킬 수 없는 이유로 자기가 속한 집단을 떠나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그 집단에서 붸겨날 경우 이 소문은 관련 직종의 모든 집단에게 퍼지게 돼 결국 그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이유로 오야붕이 꼬붕들을 얼마든지 '착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Befu 1963: 64)


2. 이에모또(家元) 제도

이에모또(家元)란 또다른 형태의 유사 친족제도라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에모또'는 어떤 예술분야, 예를 들어 전통 공예, 도예, 꽂꽂이, 다도, 서예, 춤, 유도 등의 예술가 집단에서 스승과 그의 제자들의 연대로 이루어지는 조직이다. 집단 자체가 '이에모또'라고 불리워지고 집단의 장(長) 또한 '이에모또'로 불린다. 가와시마에 의하면 1952년 당시 일본고전무용계에만도 64개 이상의 이에모또가 있었다고 한다 (川島 1973: 322). 예술계의 경우 동일한 이에모또에 속한 스승과 제자는 주종관계에 기초한 위계적 관계로 연결되며 가부장적 이에집단의 구성원리에 근거한다. 각각의 이에모또는 하나의 파벌집단을 형성해서 특정 예능의 형식이나 내용에 대해 배타적인 소유권을 갖는다. 즉 이에모또제도는 각 예술영역에서 예능내용을 통제하고 교육 및 예능을 가능케하는 경제조직의 근간을 구성한다.

가와시마의 논의(윗글: 322-365)에 근거해 이에모또 조직이 갖는 특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예술계의 경우 기본적인 기교과 조직은 스승에 의해 결정되고 통제된다. 제자에 의한 예술내용 해석시 수정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교육과 훈련은 비전(秘傳)과 구전(口傳)에 의해 전달됨으로써 스승의 지위는 우위성과 신비성을 고수한다. 제자가 어느정도 숙련을 받으면 자격증이 수여되는데, 이는 일본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특정 유파의 특권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격증 수여로 스승은 제자에 대해 직업적 보호와 선전의 의무를 지니고, 제자는 스승에 대한 헌신적 봉사의 의무를 지니며 스승을 함부로 바꾸지 못한다.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을 통하여 그 스승의 문하에 있는 다른 제자들과 상호연결되며, 스승들은 그들 자신의 스승을 통해 상호연결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 형성된다. 같은 파벌 안에 속한 성원들은 상부상조를 할 의무가 있다. 최고스승인 '이에모또'는 절대적 권위를 행사한다. 그는 조직의 비법을 보호하고 세력권을 조정하며, 실력유지를 하며 예술양식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이에모또안의 관계는 일종의 의사 친족조직으로, 스승은 자신을 家長으로, 제자들을 자식처럼 대한다. '이에모또' 조상의 기일에는 모두가 함께 성묘를 하며 성원들은 조직의 기장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는다. 달리말해 이에모또의 조직내의 주종관계, 신분계층적 조직, '이에모또'의 지위와 권한 등을 살펴보면 이에모또가 단순히 계약에 근거한 조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친족조직'에 유사한 조직원리와 인간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예술계의 이러한 조직원리는 고정된 형식을 고집함으로써 개인의 창의성이 저해되며, 엄정한 비판을 받을 기회가 배제되어 결과적으로 예술적 발달을 저해하고, 이에모또 조직이 하나의 파벌화하면서 능력을 중심으로한 경쟁이 아니라 기득권을 둘러싼 파벌적 경쟁을 결과시킨다는 비판도 많이 제기되어져 왔다.


3. 경영가족주의와 온정주의

근대화 이후에 이에제도의 원리가 하나의 강력한 모델로 작용한 또다른 영역으로 경영가족주의를 들 수 있다. 헨드리(Hendry 1995: 38)가 지적하듯이 현대의 맥락에선 회사자체가 전통적인 이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가장이 이에 구성원들의 충성심을 기대하던 식으로 회사는 종업원의 헌신을 기대하며, 종업원의 실제 이에의 이해와 상충할 경우 회사를 집안일보다 우선시하도록 기대된다. 여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상사는 종업원 개인과 그의 가족일까지 '챙겨주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영가족주의'와 '온정주의'는 모두 원형적 이에가 변용된 이후에 필요해진 것이다. 예컨대 대규모의 근대 경영조직은 그 규모만으로도 어떤 친족적, 혹은 유사친족적 조직에 의해 업무 수행을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근대적 고용관행이나 복잡한 업무등은 경영조직을 '합리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원래 가업으로 성장한 기업의 경우는 이에와 경영이 분리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아예 근대적 경영조직으로 출발한다. 반면 과거의 '친족적' 요소는 조직이라기 보다는 이념으로서의 새로운 위치를 부여받는다. 소위 '경영가족주의' 하에서 기업은 하나의 가족으로, 경영진과 노동자 사이는 부모-자식 관계로 개념화된다.

 

나아가 고용관행도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을 근간으로 하여, 기업이란 단지 자본주의적 경제논리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적 의무와 유대가 지속되는 장으로 상정된다. 이런 제도는 종업원의 충성심과 안정적인 노동력 확보에 매우 유리하며, 실제 일본 경제의 성장을 이런 문화적 원인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본내외에서 하나의 커다란 설명틀로 존재하였다. 반면 경영가족주의는 국가의 노동정책, 사회복지정책의 미비와 관련성이 있음도 지적된다.


4. 가족-국가 이데올로기, 혹은 사회통제를 위한 가족이데올로기

가족에 관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보수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로 동원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가 메이지 이후 이차대전 까지 존재했던 소위 '가족-국가' 이념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메이지 민법은 가부장적 가족을 명문화함으로써 개별 가족내에서의 가장의 절대적 권한을 강화시켰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근대국가를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수단의 하나가 된 것이 유교적 가족도덕에 근거한 국민교화였다. 특히 이 유교적 교화정책의 기본근거가 된 것이 메이지 23년의 <교육칙어>로서 그 내용은 한편으로는 부모의 절대적인 존귀함을 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천황을 아버지 혹은 本家의 가장으로 유추함으로써 효와 충을 동일시하거나 유사한 것으로 파악했다. 즉, 국가가 하나의 커다란 家에, 천황이 이 국가의 최고 가장으로 유추되었다. 더불어 가족을 "사적인" 영역으로 규정하는 시민사회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국가기구의 한 구성부분으로 간주했다. 즉, 가족을 국가의 기초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벽돌과 같은 것으로 보아 가족내에서의 올바른 행위규범은 곧 공동체적 국가의 존립에 직결되는 것으로 개념화되었다. 이러한 가족-국가 이념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보수화되고 일본사회를 전체주의적으로 재편해 가는 과정에 직접적으로 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VI. 현대사회 속의 이에(家)·가족(家族)·친족

이상의 논의를 통해 소위 '원형'으로서의 이에와 친족제도의 특징들을 살펴보면서 동시에 역사적, 사회경제적 맥락의 차이에 따른 변이에도 주목해 보았다. 그렇다면 현대 일본사회 속의 이에와 친족제도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사실 현대사회 속의 이에나 친족은 한두 페이지로 논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다기한 변화를 겪어왔으며 여러가지 '문제점'을 노정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구조적인 측면에서의 변화와 그 구성원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변화 모두를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일본사회 전체의 거시적 변화에 의해 '원형'으로서의 이에나 친족이 존립하기 위한 조건들이 근본적인 변해왔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제도적인 변화로 전후 신민법은 기본적으로 가족원의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 민주적인 가족제도을 뒷바침하려는 것으로서, 예컨대 상속에 있어 형제간의 평등상속과 성별 평등을 제도적으로 도입하였다. 물론 이런 법적 제도가 곧바로 일본인들의 관행에 그대로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후계자 단독 상속에 의한 이에의 영속이라고 하는 원형적 이에의 존립 기반을 크게 흔드는 것이었다. 두번째로 일본인들의 전반적인 생활스타일이나 의식도 커다란 변화를 겪어왔다. 특히 전후의 급속한 도시화와 경제성장을 겪으며 1960년대 후반경이면 급격한 이농과 더불어 소위 "샐러리맨화"와 "마이 홈 주의"가 확산되면서 핵가족이 새로운 이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세번째로, 경제구조의 변화는 구래의 가업(家業)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하나의 경영체로서의 이에'를 붕괴시켜왔다. 농업에 기반했던 농촌의 이에가 그 실질적 기능을 상실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고, 기타 다른 전통적 가업의 여건도 굉장히 어두운 상태이다. 예컨대 필자의 현지조사지인 아이즈 와까마쯔(會津若松)시의 경우 농업을 제외한 전통산업의 양대 축은 칠기와 주조였는데, 근대화 이후 이들 산업은 계속 그 규모가 축소되어 왔으며, 특히 '거품붕괴' 후 최근 수년간의 불황 속에서 급격히 와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산업은 대개가 가업으로 운영되던 것으로 현재의 상황은 후계자를 확보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가업을 중심으로 한 이에가 그 존재근거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컨대 위에서 정의한 '세대를 거듭해 특정의 주거에 동거하며 가업을 계승하고 선조숭배를 하며 영속하는 집단'으로서의 이에란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수 있다. 나아가 미혼화 경향의 증가, 독신가족의 급증, 이혼률 상승, 편부모 가족, 부부별성운동 등등이 모두 위에서 고찰한 원형적 이에와는 상충되는 현상들이다. 실제로 현지의 일본인들은 '이에'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상당히 저항감을 보일 정도로 상황은 변화했고, 어쩌면 현재의 맥락에선 분석적 개념으로서 '이에'(家)보다는 '가족'(家族)이란 개념이 더욱 적합하고 유용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분석적 개념으로서 이에보다 가족에 비중을 두고 접근한다고 할지라도 현재의 일본가족의 모습 또한 '전형적 가족' (일단 '한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제도체로서 부부와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 사랑의 공동체' 정도로 정의해두자) 개념으로 파악되기 힘든 측면이 많다. 모리타 요시미쯔(森田芳光)의 영화 <가족 게-임>(1983)이나 유미리(柳美里)의 소설 <가족 시네마>(1997)에서 희화적으로 그려지는 가족원간의 관계단절이나 의사소통 불능상태, 나아가 가정내 폭력과 병리현상의 만연은 '가족 해체' 담론을 자극하고 있으며, 미혼, 이혼, 결혼기피, 노년의 미망인 등으로 구성되는 독신가족 비율의 급증은 일본의 가족이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 토리고에가 지적하듯이 학계나 일반 담론에서는 가족의 붕괴와 해체가 주요 목소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실제 농촌이나 주변부에 들어가보면 여전히 이에가 중요한 준거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鳥越皓之 1994: iii)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구체적 실체로서의 이에가 점차 붕괴되는 반면 '의제'(擬制)로서의 이에나 이념으로서의 가족주의 등의 존재모습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요컨대 앞으로의 연구 과제는 보다 구체적인 사례와 맥락에 천착해서 분석해 내는 작업이 더욱 많이 축적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구 방향은 사실 인류학내에서 그간에 이루어진 가족과 친족에 대한 연구사와 관련해서도 고찰될 수 있는 것이다. 인류학내에서 가족과 친족의 연구는 한동안 침체기를 거치면서 최근에 다시 중요 영역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런 위상 변화의 배경에는 초기의 가족·친족 연구가 지나치게 구조적 분석에 치중한 결과 점차 지적 흥미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된 점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새로운 시각과 관점에서 가족과 친족을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초기의 연구와 비교해서 현재의 연구들이 보이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출자관계 중심의 구조적 분석에서는 개별 구성원들간의 역학관계나 그들이 경험하는 정서적인 측면이 대개가 관심밖이거나 무시되었던 반면에, 198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는 행위자 중심의 접근이나 실천이론에 근거한 분석들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가족원이나 친족 구성원을 그 구조적 위치뿐만 아니라 감정과 이해관계를 지닌 하나의 행위자(actor)나 주체(subject)로 분석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가족과 친족을 그 자체로 독립된 제도체로 다루기보다는 다른 변수들, 예컨대 계급, 성차(gender), 종족성(ethnicity) 등과 연결시켜 분석하고, 나아가 전반적인 사회적 변화와 관련시켜 적응하거나 변화해가는 모습에 주목하면서 연구의 돌파구를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 비판과 결부되어 가족과 성차를 연결시키려는 연구(이는 그동안 구조적 분석에서 배제되어온 성별인 여성에 주목할 수 있게 해준다), 구성원들의 권력관계나 일상적인 이해관계, 정서적 경험, 정체성 문제, 행위자들이 사회구조에 대응하고 이것을 재해석하는 방식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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