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추리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 [제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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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에서 메인에서 본 글이 계속 게재 해주는 덕분에 원래
월요일 게재 예정을 오늘로 당긴다.
그리고 격려해주신 많은 답글에 일일이 감사 못 드렸지만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고마우신 답글로서 나의 그간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라서
더욱 소중스럽게 생각된다.
그러나 진돗개 애호가들로부터 진돗개 조상이 외국이니 제주도니
하는 외래설에 감정 섞인 국수주의적 답글도 받았다.
울프 독의 감사한 점은 악플러가 적다는 점이라고 그래서
악플들에게 비교적 관대했지만 이번만은 대단히 섭섭했다.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발부터 하지 마시고 2주간
기다려 드릴테니 나의 글의 조목 조목을 읽어 보시고 따져서
문제를 제기해 주시면 이 글의 뒤에 포스팅 해드림을
약속드리겠다.
28. 흑구 진송이의 죽음.
나는 제주개나 거제개의 실체를 찾는 조사가 다른 방향의
수확으로끝나 버렸지만 원래의 목표는 단념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막막한 가운데에서도 조사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우연이라는
행운의 여신이 손짓을 해 주었다는 기억을 힘주어 되뇌며
어떤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은 좀체 애타는 나에게 미소를
보내지 않았다.
그런 대로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
이제 이십 세기는 끝났고 이십일 세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찌는 듯한 여름의 극성이 머리를 숙이는 늦은 여름 나의 집안에
우환이 찾아왔다.
흑구 진송이가 앓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강아지였던 진송이를 진도에서 데려 온지 벌써 십 이년의
세월이 지났으니까 개의 수명으로 본다면 아주 장수 한 셈이다.
그간 잔병치레 한번 없었던 진송이도 나이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속초의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봤지만 젊은 수의사는 뚜렷한 진단을
내리지를 못했다.
그는 병명을 대는 대신 퉁명한 한 마디를 했다.
“ 늙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이제는 갈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진송이가 우리 집과 나의 인생에서 어떤 가치로 봉사했는지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해대는 그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나는 잠자코 진송이를 안고 다른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같이 따라 갔던 아들이 나를 막아섰다.
“ 아빠 ! 진송이를 서울의 유명한 동물병원으로 데려 가세요.
정말 진송이는 너무 늙어서 어지간하게 치료 해봐야 살리기
힘들지 몰라요 !“
녀석은 진송이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진송이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그런 아들이 진심으로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하는데 외면하기도
힘들었고 또 그 말에 일리도 있어 보였다.
마침 이틀 뒤 정 사장이 사업상 애견 상들이 많은 충무로로 출장을
사실을 알았던 터라 그에게 부탁해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밤비가 내렸다.
빗발은 점점 심해져서 거센 소낙비가 되었다.
창이 부옇게 밝아오는 새벽녘이 될 무렵 잠이 깬 나는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내다본 하늘은 무거운 구름이 낮게 깔려있었으나
비는 그쳐 있었다.
나는 서둘러 슬립퍼를 끌고 진송이의 집이 있는 뒤꼍으로 달려갔다.
모서리를 도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진송이가 집 밖으로 상체를 절반쯤 내놓고 모로 누어있었다.
나는 급히 다가갔다.
나는 찰라나마 진송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들이쉬려고 했다.
진송이의 두 눈 위의 누런 점이 왜 그렇게 산개의
진짜 눈동자로 보였는지
나중에 생각 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아래 두 눈은 조용히 감겨있었다.
빗속에 노출된 상반신은 흠뻑 젖어 있었다.
이미 생명은 그를 떠난 지 오래였다.
진송이의 젖은 머리는 우연히도 남쪽 진도의 고향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 것은 그가 죽기 전 푸른 물결 넘실대는 고향이 그리워 몸부림을
친 것 같이도 보이게 해서 그의 주검을 더욱 애처롭게 보이게 했다.
나는 산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마음으로 진송이의 젖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돗개 가문의 진짜 적자일 수도 있는 흑구로 태어났지만 일부 인간들의 무지로 해서 족보에도 오르지 못하고 잡견으로 팔려 나가기 전 나와
만난 것은 서로가 행운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인연이었기에 진송이는 우리 식구의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더해서 진송이는 십 이년이란 믿지 못하게 긴 세월을 진돗개
조상 찾기 테마에 나를 붙들어 주었던 주인공이었다.
진송이가 없었더라면 나는 한 연구에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진한 인연으로 맺어진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와의 작별은 나를 슬프게 했다.
진송이가 저 세상으로 가고 나의 진돗개 조상 찾기 열의는 묘하게도
시들해져 갔다.
역시 진송이는 이 믿기 어렵게 장기간 추진해온 조사에 원동력을
제공해준 나의 정신적 후원자였던 모양이었다.
그 동안 십 년 넘게 동물의 생태 연구에 역사 연구라는 특이한
소재를 가미한 진돗개 조상 찾기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빈약한
자료 때문에 거듭하던 고역이 진송이의 죽음 뒤에 식어진 열의와
합쳐져 이 프로젝트를 진저리나게 만들었다.
진돗개의 조상 찾기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이래 두 번째로 찾아온
이번 슬럼프는 전의 것보다도 더 심각했다.
나는 진돗개 조상 찾기의 프로젝트가 벽에는 부딪쳤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음에도 이 프로젝트를 그만 접어 두고 작년에
시작한 한국 담비의 조사에 전념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29. 네 눈이 제주개의 사진 발견.
21세기의 문턱을 넘은 다음해 겨울 추운 어느 날, 뒤 늦게 퇴근해서
이미 어두어진 집 마당으로 들어설 때였다.
아들이 뛰쳐나와 나를 맞았다.
내가 방안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자 아들은 다가와서 용건을 꺼냈다.
“ 아빠 ! 서울에 가면 티셔츠에 사진을 인쇄 해주는 곳이 있대.
우리 반 아이는 자기 여자 친구 사진을 인쇄한 티셔츠를 교복
안에 입고 다녀.”
나는 그 놈의 맹랑한 소리에 기가 막혀 물었다.
“ 너도 여자 친구가 있냐?”
“ 아이 !아빠두! 그런 것 없어. 난 진송이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를 갖고 싶단 말야 !”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 녀석이 아직도 진송이를 생각하고 있구나 ’
아들은 자기 방에서 가져온 사진을 내놓았다.
몇 년 전 뒷 산 잔디밭에서 진송이를 껴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 이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어.
서울 S 백화점에 가면 이런 것을 만들어 주는 곳이 있대!“
나는 아들이 진송이를 생각하는 기특한 마음씨를 보아서도 그 간청을
빠른 시간에 들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십이월 중순 나는 월차 휴가를 얻어
새벽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늦 장가 가는 내 친구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얻은
월차 휴가였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서 아들의 부탁도 해결해 줄
생각이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차려놓은 점심도 안 먹고 나는 아들이
말한 S 백화점으로 향했다.
평일인데도 연말을 맞은 백화점 안은 인산인해였다.
나는 물어 물어 겨우 아들이 말한 가게를 한쪽 구석에서 찾아냈다.
엑서사리를 같이 취급하는 작은 코너였다.
덩치 큰 판매 여사원이 백화점 점원다운 친절로 맞아 주었다.
내가 강원도에서 찾아 왔다고 하니까 고맙다는 인사를 넘치게 했다.
“ 이런 서비스를 하는 곳이 드문데 우리 코너를 용케도 찾아 오셨군요.”
그는 내가 건네준 아들과 진송이의 사진을 보며 덕담을 했다
“ 아드님이 예쁘게 생겼네요. 동물을 좋아하는 모양이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다스러워 보이는 그녀는 한마디를 더 했다.
“ 동물사진을 좋아하는 손님이 한 분 더 있는데요. 그 분도
유치원 다니는 아들이 좋아 한다고 동물 사진을 넣은 티 셔츠를
대여섯 번이나 만들어 갔어요.
X 신문사에 다니신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좋은 동물 사진을
잘도 구해 오시더군요.”
X 신문사라----?
어쩐지 마음 밑바닥의 잠재의식이 희미하나마 꿈틀하고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여사원은 컴퓨터가 붙은 기계를 조작하며 계속 수다를 늘어 놓았다.
드디어 사진에 있던 아들과 진송이의 모습이 크게 확대되어
인쇄된 티셔츠가 완성되어 나왔다.
나는 그 마술 같은 기술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야 -- ! 세상 좋아졌구나!”
여사원이 맞장구를 쳤다.
“ 네, 그래요. 세상 좋아 졌어요. 컴퓨터의 단추 몇 개만 누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 됐거든요.”
찰라에 나의 잠재의식은 크게 요동했다.
세상 좋아졌구나?
컴퓨터의 단추 몇 개만 누르면?!
시간은 오래 됐지만 누군가가 그런 말을 나에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티 셔츠에 인쇄된 진송이를 들여다보며 기억을 더듬는 순간 아까
나의 잠재의식을 간질이던 단어, X 신문사가 맹렬한 기세로 나의
현재의식을 뒤흔들었다.
그렇다 !
비로소 나는 생각이 났다.
이 글을 처음부터 읽어온 독자들이라면 이해가 갈 것이다.
진돗개 조상을 찾는 조사를 시작했던 초기에 박 선생은 X 신문사에
가서 컴퓨터 검색으로 중요한 기사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라이카와 진돗개가 이중모[二重毛]와 높은 농도의 모유 유지방
성분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기사이다.
내가 여사원과 나눈 대화와 비슷한 말을 그때 그가 했었다.
나의 머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내가 찾다가 중단한 데이터의 탐사를 꼭 같은 방법으로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나는 서둘러 돈을 치르고 에스컬레이터 위를 구르듯이 뛰어 내려갔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나는 X 신문사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백화점에서 택시로 가면 기본요금만 되는 거리였다.
신문사 자료실에 도착하는 데는 십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숨을 고루면서 상냥해 보이는 여사원에게
자료 검색 절차를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실망스러운 대답을 했다.
“ 컴퓨터가 다운되어서 오늘은 검색이 안 되는데요. 내일 오시죠.”
나는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강원도에서 왔는데----”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는 나의 말에 의외로 친절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 무엇을 검색하시려고 하시는데요?”
“ 제주개요. 없으면 거제개라도 좋아요.”
그녀는 이상한 개 이름들이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이 자료실에 육십 년대 이후 개에 관한 기사는
전부 파일 해놓은 스크� 북이 있어요.”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잠시 후
서너 권의 낡은 스크� 북을 들고 나왔다.
최첨단의 컴퓨터 검색을 기대하고 달려왔던 나는 그 먼지 나는
책들을 보고 힘 빠지는 실망감을 맛보았다.
그 것들을 온종일 들여다 보았자 별다른 수확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모처럼 친절을 베푸는 그녀의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는 속초로 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을 의식하면서 스크� 북을
빠르게 넘겨 갔다.
삼십분 정도 색이 누렇게 바랜 책장을 넘기던 나는
한 페이지에 이르러 고압선에 감전된 것처럼 놀랐다.
스크� 한 제주개의 기사가 그 곳에 있었다!
그것도 사진과 함께!
나는 심호흡을 하고 기사를 읽어 나갔다.
1972년 1월의 기사였다.
거제도의 행정부서가 했었듯이 제주도경도 그 전 해부터 혹시나
남아 있을 제주개를 찾아 제주도 산간 벽지를 샅샅이 뒤졌었다.
[이 제주개는 라이카 견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북제주군 애월면 하가리 한 농가에서 촌로들이
제주개라고 하는 개를 한 마리 발견했다.
나는 색이 바래서 희미해진 사진을 자세히 드려다 보았다.
외형상 털 색깔이 흰색과 검정 색이 뒤섞인 바둑이
무늬인 것이 실망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미 거제개 탐색의 경험이 있는 나는 이를 이해 할 수 있었다.
거제개와 마찬가지로 진짜 제주개도 멸종 단계의 이전 단계인
잡종화 단계를 오랫동안 거치다가 멸종했을 것이고 이 단계를
거치면서 상당히 잡종화된 개를 사람들은 순종으로 잘못 알고
있을 것이다.
잡종 제주개를 진짜 제주개로 알고 있던 촌로들은 순종 제주개를 찾는
경찰들에게 역시 이 잡종화가 진행된 제주개를 진짜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라이카와의 유사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색깔은 그렇다 해도 이 개의 커다란 몸집과 길고 뾰족한 입은
라이카의 그 것이었다.
그리고 제주개가 라이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이 개는 눈 위에 달고 있었다.
희미한 사진이지만 그 개의 눈 위에는 선명한 두개의 누런 점이 있었다.
그 점들, 개가 네 눈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 점들은
이스트 라이카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리고 진돗개 흑구가 라이카로부터 이어 받은 가장 분명한
신체적 유산이기도 했다.
그 뿐이 아니다.
십 이년 전 내가 진도의 한 어촌 마을에서 강아지 진송이와
첫 대면을 했을 때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누런 점들이었으며
진송이가 이 세상을 뜬 뒤 나에게 작별의 인사를 보냈던 점들이었다.
이 점들에서 칠백년의 역사를 흘러오면서 엮어진
라이카-->제주개 --> 진돗개의 혈통을 두 말할 것도 없이
확인 할 수 있었다.
기사는 제주개가 라이카의 후손임을 짐작케 해주는 또 다른
내용도 담고 있었다.
이 개는 주인 문 광호씨가 그 전해 시월에 오 만원을 주고 사왔는데
단 두어 달 사이에 노루 네 마리와 오소리 스물 한 마리를 잡는
대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조상인 제주 라이카가 그 월등한 사냥 능력 때문에 남해안 각처로 팔려
나갔었던 화려한 경력를 이 개는 유전된 사냥 실력으로서
재현해 보였다.
행여 빠뜨린 글자가 있을까봐 한자 한자 기사를 읽은 나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진돗개의 조상을 쫓아 안개 자욱한 망망한 대해를
방황하듯이 자료를 찾아온 나에게 이만한 자료는 구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라면 진돗개 조상 찾기라는 나의 역사추리를 뒷받침 해줄
자료의 기능을 충분히 해줄 것이다.
나는 한 시간 넘게 제주개의 사진을 보고 또 보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한참 뒤 기사를 복사해서 소중히 간직하고 신문사를 나와
그 길로 속초로 돌아왔다. ]
밤늦게 집에 돌아온 나는 밥도 들지 않고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원래 써놓은 원고에 기사의 내용을 삽입해 넣었다.
끝나고 보니 새벽 한시가 넘은 늦은 야밤이 되어 있었다.
30. 긴 공백 - 그리고 제주도행.
나의 진돗개 조상 찾기는 위의 글과 함께 일단 한번 끝이 났었다.
나는 진돗개 조상 찾기의 긴 기록을 몇 번 다듬어 지방과 중앙의
모 신문사에 한번 보내 봤었다.
그랬더니 지방 신문사에서는 당장 게재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어쩐지 오랜 시간을 투자한 이 기록을 지방지보다는 중앙지에
한번 연재 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계속 중앙의 모 신문사에서
대답이 오기를 기다렸다.
편집 책임자가 첫 통화부터 관심을 보여서 내심 상당한 기대를 했었다.
일주일 쯤 지나자 연락이 왔다.
미안 하다는 말과 함께 편집 회의를 했는데 연재를 안 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는 통지였다.
이유를 물었더니 내부 사정이라고만 대답해주었다.
나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뭐라고 말할 처지도 아니어서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그간 드린 정성과 노력을 되돌아보니 섭섭한 생각은 물론이고
창피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이 일을 계기로 진송이의 죽음 바로 전부터 나는 진돗개 조상 찾기에
슬슬 찾아오던 귄태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더 이상 이 원고를 게재해
줄 언론사를 찾는 것조차 포기하고 원고를 담은 CD를 책상
깊숙한 곳에 집어넣은 뒤 내 머리 속에서 이 테마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때가 되면 -----”
사실 막연히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조금은 있었다
허나 조사에 지나치게 긴 세월을 투자하고도 얻은 것이 별로 없었던
누적되었던 피로감이 부작용으로 의욕 상실을 불러온 것 같았다.
이 무렵 나는 강원도 남쪽의 작은 국립 공원으로 발령 나서
가족들을 놔두고 혼자 부임을 했다.
주말에나 가족들을 만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곳에서 새로 잡은 조사 테마에 재미를
붙여서 그런대로 재미있게 근무했었다.
조사의 새 테마는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었다.
미스 킴 라이락이라는 꽃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해방 바로 뒤 북한산에서 미국의 아마츄어 식물 학자가 채집한
야생 라이락 씨앗을 미국으로 보내서 미국 화훼시장을 목표로
육종 시킨 것이 미스 킴 라이락이다.
미스 킴 라이락은 향도 진하고 병에 강한데다가 가꾸기 쉽게
키도 작아 금방 인기를 끌어서 미국 라이락 시장의 30%를
차지했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고 판매도 많이 되고 있다.)
식물 중에서 드물게도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선전해주는 고마운
꽃임에도 그 꽃을 낳은 한국의 야생 라이락의 실체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털망개 회나무 또는 수수 꽃다리라는 이름의 이 야생 라이락을
우연하게 국립공원 꼭대기에서 발견한 나는 이 꽃의 피고 지는
일 년 동안 정기적으로 그곳을 방문해서
그 변하는 모습을 디카로 사진 찍고 관찰 일지에 꼼꼼히 기록했다.
이 기록이 끝나면 어린이 잡지에 기고하기로 편집 책임자와 이야기가
다 되어 있어서 책임감 같은 것도 있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그 높은
산 꼭대기를 드나들었다.
이 작은 국립공원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진돗개에 대한 생각을
거의 잊었었다.
그리고 이년 뒤 나는 다시 발령에 따라 집이 있는 본 직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뒤, 나는 서울의 국립공원 관리 공단의
김 이사님의 딸이 제주도에서 결혼 한다는 청첩장을 받았다.
그 분은 제주도가 고향이었다.
그 분은 내가 신입 사원이었을 때 나의 과장이었었다.
근처에 살던 그 분 가정의 어린 딸이 우리 부부를 무척이나
따라서 우리 집과도 유대 관계가 돈독했었다.
그 때 맺은 인간관계 덕분에 나는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이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예식장이 거리가 멀어서 가기가 곤란했지만 외면하기도
곤란했다.
직장에 매인 나는 아내를 대신 보내기로 하였다.
나는 청첩장을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 당신이 수고를 해 주어야겠어.”
아내가 청첩장을 열어보더니
“ 아 -! 그 어린 소영이가 어느새 다 커서 시집을 가네! ” 했다.
그러더니,
“ 결혼 식장이 제주 시내가 아니네요. 북제주군 애월면----
무슨 교회군요.
찾아 가기가 조금 힘들겠어요. 애월이라-- 슬픈 달이라는 뜻인가?
이름도 독특하네요.”
나는 아내에게 면박을 주었다.
“ 그런 이름이 어디 있어. 한자로는 달리 쓰겠지.”
그리고 몇 분이 지났다. 이상하게도 애월이라는 이름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디서 나하고 만났던 이름인데----.”
그렇다!
제주개가 발견 되었다고 보도한 신문 기사가 있었다!
나는 얼른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둔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
헤매이던 CD기록을 꺼내들었다.
그 곳에 분명히 있었다!
제주개가 발견된 곳이 애월면 하가리였었다.
그 때 나는 그 기사의 내용이 ‘이 기사가 30년 전이 아니라
지금이라면 당장 달려가보겠는데 ---’하며 몇 번씩이나
아쉬워 했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 지도를 보고 이 장소를 몇 번씩 확인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남았던 것이다.
나는 출근길에 그 기사를 가지고 사무실로 가지고 갔다.
그 날 틈틈이 그 기사를 보고 생각을 다듬어 갔다.
개는 세월이 지나 이미 이 세상 것이 아니겠지만 그 때 30대였었던
개 주인은 아직 살아 있을 듯 했다.
일부러 가는 것도 아닌데 이번 기회를 활용해서 그 분을 한번 만나
진짜 제주개의 면목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더블어서 다 타버린 재처럼 식어있었던 나의 진돗개 조상 찾기의
온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 했다.
점심시간 무렵 생각을 완전히 굳힌 나는 개의 주인공
문 광호씨를 접촉할 방법을 찾았다.
나는 이 방면에 노 하우가 있었다.
제주도 114를 돌려 애월면 사무소의 전화번호를 안 다음 그 곳에
전화를 해 하가리의 이장댁 전화 번호를 알아냈다.
좁은 동네 인만큼 그가 문 광호씨를 알 것 같아서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이장과 통화가 되었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은 그는 대단히 친절하게 내가 묻는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유감스럽습니다. 문 선생님 가족은 오래 전에 제주시로
이사 가셔서 이 동네에 사시지 않습니다.”
“ 아-그러세요? 혹시 그 분의 연락처를 아십니까?”
“ 그 가족과 연락이 되니까 알려 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이 기뻤다. 그러나 웬걸, 이장의
한마디가 힘을 빠지게 했다
“ 안타깝게도 문 선생님은 작년 연말에 돌아 가셨어요.”
나는 잠시 멍했지만 가족들이라도 만나면 개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족의 전화 번호를 받았다.
31. 신문 기사의 제주개 주인과의 만남
퇴근 하자말자 나는 제주로 전화를 했다.
미망인으로 짐작되는 분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자치지종을 이야기했다.
허나 그 녀는 미리 이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난데없이 강원도에서
전화를 해서 엉뚱하게 제주개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나를 좀체
신뢰하려 하지 않았다.
“ 저는 잘 모르니 토요일에 오시면 오후에 저의 아들 사무소로
오셔서 이야기 하세요.”
어찌 됐건 이제 30년 전에 있었다는 제주개의 안개 같은
조각 모습이라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수화기를 놓고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말했다.
“ 이번 제주도 결혼식은 내가 가 볼테니 그리 아셔.”
금요일 준비를 마친 나는 심야 우등 고속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서 제주행 아침 비행기를 탔다.
제주도에 도착한 나는 비교적 시간 여유를 가지고 애월까지 가서
결혼식에 참석 할 수 있었다.
식이 끝나고 오래간만에 다른 지역 근무
친구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다가 문 광호씨의 둘째 아드님이 운영하는
제주시 에어컨 대리점에 찾아갔을 때는
저녁이 가까운 늦은 오후였다.
그 곳에서 문 광호씨의 미망인과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 뒤에 내가 내놓은 신문기사의 사진에 두 사람은 놀라는 눈치였다.
자신들이 까마득한 옛날이었던 삼 십여년 전에 집에서 길렀던 애견이
신문에 났었던 일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느닷없는 용건으로 찾아온 나를 다소 경계하던 두 사람은 이 사진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은 듯 싶었다.
모자는 집에서 찍은 개의 다른 사진을 보여 주며 적극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문광호씨는 하가리 이장이 이야기한대로 이미 전 해에 세상을 떠났다.
신문 기사만 보고 그가 평범한 농부인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본즉
축협 조합장까지 지낸 지역의 알아주는 유지였다.
미망인의 고인의 추억으로 가끔 눈시울을 적셔가면서도 또렷한
기억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고하신 전 축협 조합장 문광호씨 -- 독구의 주인
개의 이름은 독구였다.
독구는 사냥 솜씨가 대단했던 것은 물론이고 가정견으로도
일류라고 할 만큼 영리했었다.
여러 이야기 중에 개가 사냥물을 쫓을 때는 가시덤불 따위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 들어 해치웠다고
할 만큼 용맹했었다는 이야기라던가,
꿩이 알을 깐 둥지를 보면 그 알들을 한알 한알 집으로 물고 와서
주인에게 바쳤다는 이야기는 내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화였다.
마지막 제주 라이카의 혈통을 지닌 독구는 문씨 일가가 제주 시로
이사 오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야간에 밤 외출을 나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ㅁ
문광호씨 유가족으로 받은 독구의 다른 사진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는 맥아더 원수의 말이 생각나는
제주 라이카의 최후였다.
어느 정도 대화가 진행 된 뒤 나는 두 모자가 건네준 개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이 사진 역시 희미했던 신문기사의 사진에서 확인 했었던 라이카의
혈통이 역력히 보여 주었다.
흑구 진돗개나 몽골 라이카의 상표인 앞 이마의 두 점은 물론이고
긴 앞 다리와 억세 보이는 골격, 그리고 긴 주둥이가 라이카의 혈통을
그대로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앞 글에서 이 개의 얼룩 무늬에 대해서 잡종화의 진행이 된 현상으로
단정적으로 이야기 했었는데 그 간 내가 여기저기서 얻은 라이카들의
추가 지식에 의하면 러시아 라이카에도 이런 얼룩무늬가 보이니
쉽게 단언하기는 곤란 할 듯하다.
나는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두 모자와 아쉬움을
가지고 작별했다.
두 모자는 나에게 개의 사진을 복사하도록 흔쾌히 빌려 주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 속에서 생각지 않았던 수확을 거두었다.
내가 빌린 사진을 꺼내 들고 계속 들여다보는 모습을 본
택시 기사가 물었다.
“ 저도 개를 좋아 하는데 손님도 개를 좋아 하시는 모양이군요.
그 개는 무슨 개인데 그렇게 유심히 보십니까?”
나는 그의 진지한 태도에 그만 제주도에 온 목적과 그 간의 경과를
간단히 들려주었다.
“ 그 개가 애월에서 왔다면서요. 저도 애월에서 컸는데---”
“ 그래요 ? ”
“ 제가 어렸을 때 손님이 말하시는 검정개들을 애월에서 봤어요.”
“ 네?”
“ 아까 말씀하신 검고 눈 위에 누런 점이 있는 개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 것이야 말로 놀랄만큼 중대한 정보였다.
“ 아니 그 개들이 진돗개 같은 모습이었습니까?”
“ 네. 그런 개들도 있었고 X 개 같은 것도 있었고 생김생김은
각각이었지만 눈 위에 점이 있었던 개들이 확실히 있었어요.”
생각지도 않았던 정보를 이 택시 안에서 얻은 나는 마음속으로
하늘에 감사 했다.
나는 그 날 여관에서도, 다음날 비행기 안에서,그리고 집에
돌아 와서도 이 라이카의 냄새 가 희미하게 나는 검정색과
누른 점의 문제를 두고 연구를 거듭했다.
75년도 출생 검정 제주개
문 광호씨의 개에서도 몽골 라이카와 진돗개의 연결 고리인
제주도의 라이카 단서를 확보했지만 더 움직일 수 없는 산
증거를 찾아 볼 수 있는 같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나는 몇 년 전 신문에서 제주개의 기사를 발견하고 거기서 조사를
마무리했던 나의 게으름을 되풀이해서 자책했다.
그 전부터 진돗개의 조상이 제주도라고 추리를 해놓고도 그 조사를
위해서 진도는
가 보았으면서도 제주도는 와 보지 못한 것은 내 조사에
중대한 허점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김 이사님의 따님 결혼식이 제주도에서 있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거듭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조사 진로는 역시 이 상오씨의 저서에서 나오는
한 정보가 근거가 되었다.
앞서 야성의 부름이라는 미국 책의 저자 잭 런던이 한국 북부에서
에스키모 같은 개의 발견에 대해서 썼음을 기억 할 것이다.
활동 무대가 남한이었던 이 상오씨는 남한에도 이런 전형적인
한국 토종개가 있었고 자신이 이런 특징을 가진 개를 경북 의성
벽촌에서 발견하여 사냥개로 썼음도 기록으로 남겼다.
아무런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이 육지 개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든 이상오씨는 개의 털 색깔이 누런색이라고 했고 개 그림도 남겼다.
아무래도 이 그림은 그가 경북 의성에서 발견해서 명 돼지 사냥개로
만든 그 토종개를 데상한 것 같았다
상기 토종개는 육지 내륙 깊은 곳인 의성에서 발견된 한국 토종개
이 상오씨의 말이 맞다면 진돗개 황구의 색깔은 이런 남한
서식 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반도 남부에 거주하는 개의 색깔이 누런색이라면 제주도와
남해안에서 발견되는 검정개의 색깔은 이미 몇 번이나 강조한 대로
외부로부터 몽골인에 의해서 유입된 라이카의 존재를 인정치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검정색의 털 색깔에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털 색깔이
아비 개나 어미 개의 털색깔에 관계없이 부모의 유전자에 저장되어
있다가 나타난다는 사실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뒤에 제주 라이카로 보이는 네눈백이가 보인다
황구나 백구의 부모사이에서 느닷없이 흑구가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이 글의 주인공 진송이가 몸으로서 증명해 보였다.
진돗개 흑구를 순종으로 인정치 않고 그토록 탄압했는데도 씨가
마르지 않고 계속 존속되어온 것은 개의 유전자를 사람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한 원칙을 수립했다.
제주도의 라이카가 오랜 세월의 잡종화로 표준 체형을
잃어 버렸다 해도 눈 위에 누런 점이 있는 불랙 앤드 탠의
몽골 라이카나 진돗개 흑구의 색깔은 제주도 개들의 유전인자
어디엔가에 꼭꼭 숨겨져 내려오지 않았겠는가 하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문 광호씨의 개에서 라이카의 후손으로서
약간 불만스럽게 생각되는 색깔의 문제를 완벽하게 보완하게
되는 것이 된다.
나는 다음 주부터 이 조사에 착수했다.
제주도 각 시골 면 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진돗개 흑구를
닮은 개가 행여 그 동네에 있는지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며칠간의 노력에도 성과는 없었다.
담당자들은 그런 이상한 질문 자체를 귀찮아했다.
그래서 조사 단위를 면 밑의 이(里) 사무소로
전화를 해 보기로 했다.
제주도에 가서 알았지만 제주도에는 육지와 달리 각
이(里)마다 사무소가 있었다.
몇 곳을 전화해 가다가 한 이 사무소의 근무 여사원으로부터
기대 하지 않았던 소리를 들었다.
“ 제주 개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요? 작년에 제주 소방서에서
일하는 어떤 소방서 아저씨도 아저씨처럼 개에 대해서
묻고 다니던데----”
소방공무원이 개에 대해서 묻고 다닌다니!
나의 호기심은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나 같은 재야 자연 과학자가 제주도에도 또 있는 것 같았다.
몇 단계를 거치는 어려움을 겪은 뒤 나는 드디어
허 은석이라는 제주개의 대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의 연락처까지 얻어낼 수가 있었다.
그는 제주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현역 공무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제주개는 라이카견이 아니라 물론
지금 축산 시험소에서 육성하고 있는 제주개를 말한다.
저녁에 전화 통화를 했는데 그도 나의 전화에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자세한 이야기를 위해서 나와 직접 만났으면 한다는 뜻을
완곡히 밝혔다.
32.드디어 만난 제주도의 청개
제주도에서 돌아 온지 5 주도 안 되어 나는 다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그가 일러 주는대로
북 제주군의 해변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 갈 수가 있었다.
첫 인상부터 사람 좋아 보이는 그가 집문 앞에서 나를 반겼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집안 문안에 들어서는 순간 집 마당 구석에 있는
매어져 있는 황구 한 마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기르는 제주개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처음 보는 제주개를
유심히 쳐다봤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이 라이카와 다른 또 다른
이 제주개에 대해서 기사를
많이 읽었었고 사진도 많이 보아왔었다.
그리고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렸지만 제주개를 험담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두어 명 만났었다.
그 들은 제주개를 진돗개의 잡종이라느니 근본을 알 수 없는
급조된 개라느니 하고 안 좋게 이야기 했었는데 이 제주개의
첫인상부터 그 들이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함부로 이야기 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제주개는 진돗개와 매우 달랐다.
나아가 이야기한다면 이 개는 앞서서 내가 짐작한대로
남방 파리아개의 영향이 크게 느껴지는 남방견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체구도 진돗개보다 작았다.
전체적으로 가냘퍼 보이는 인상이었다.
가는 동체, 작은 두상은 억세고 큰 골격을 가진 북방견 특징의
진돗개와 차별 짓게 만드는 이 개의 특징이었다.
진돗개가 다부진 권투선수의 몸을 가지고 있다면 이 개는 유연한
기계 체조 선수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듯했다.
그리고 그 둥글고 큰 눈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 눈은 마치 칵커 스페니얼을 연상시키는 순한 눈매였다.
진돗개를 포함한 북방견의 눈들은 그 들 주인인 동북 아시아 사람들
눈을 닮아 작고 가늘게 찢어진 형태이다.
동북 아시아 인들은 혹독한 빙하기를 살아 남아 오면서 설원이나
빙원에서 강하게 반사하는 빛에서 눈을 보호하고자 눈이 그렇게
작고 가늘어졌다고 하는데
북방견들도 그런 영향인지 하여튼 눈이 작고 가늘다.
지금의 제주개 눈들이 모두 허 은석씨의 개처럼 그렇게 생겼다면
이것은 제주개가 진돗개와 아무 관련 없음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제주개는 이들 모든 특징을 조화있게 갖추어 진돗개와
또 다른 나름대로의
균형있는 미를 보여 주었다.
한참을 제주개를 바라보던 나는 주인이 권하는대로 마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주인은 물론 집안 대청의 안주인도 놀라 고개를 내밀고
나를 쳐다보았다.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다니면서 새로운 발견에 몇 번씩
놀래고 충격을 받고 했었는데 이처럼 놀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바로 그 어미가 서있는 개집에서 그 옛날 진도 바닷가 어느 어촌 개집에서 그랬듯이 진송이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찰라였지만 착각을 할 만큼 그 강아지는 진송이의 판박이었다.
검정 털에 네눈박이!
그 개의 어미는 앞서 묘사한 누렁이 제주개였다.
그러나 그 강아지는 색깔만으로 본다면 몽골 라이카 - 진돗개 흑구를
잇는 중간의 링크 역할에 충분한 제주 라이카의 외모적인 특징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 검정 강아지를 따라 나온 또 다른 강아지는 어머니와 같은
누렁이 황구였다.
검은 제주개 네눈백이 강아지
내가 추정 했었던대로 먼먼 옛날 몽골에서 제주에 도입된 덩치 큰
진짜 제주 라이카는 비록 자신의 직계씨는 아니지만 방계인
남방견의 제주개에게 그 완전한 털색의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나는 드디어 제주 라이카와 진돗개를 잇는 살아있는 링크를
발견했구나 !
어떤 성취감이 나의 기쁨을 누를 수없이 솟구치게 했다.
나는 볼수록 진송이 생각이 나게 하는 이 강아지를 안아 보고
주인의 집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방안에 들어서서야 나는 비로소 아까의 쇽크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주인 허 은석씨는 조심스럽게 그간 자기가 조사하고 수집했던
두껍디 두꺼운 스크� 북과 기타 두 어 권의 노트를 내놓았다.
나는 우선 그의 자료를 보고 그 엄청난 양에 놀랐다.
비록 그의 연구가 제주개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그는 내 평생
만나 본 사람 중에 설악산 밑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는
박 선생을 빼고는 주변에서 뭐라고 하건,
또 아무런 댓가도 없는 동물 연구를 재미로 즐기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방 공무원으로서 제주 전역에 좋은 인맥도 가지고 있었고
또 산을 좋아해서 제주도 전역을 샅샅이 다녔기 때문에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보니 그의 조사 방법은 나보다도 한수 앞선 것이었다.
그는 항상 비디오 카메라와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하고 자료를 얻고 집에 와서 컴퓨터로 면밀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의 방대한 기록은 그가 오랜 세월 직접 발로 뛰면서 얻은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그의 집에서 자료를 보면서 이루어지다가 이어서
집 뒤의 해변가 횟집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 무렵까지 까지 계속되었다.
대화의 초반부터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우선 앞선 1부나 2부에서 제주도의 몽골 라이카의
설명을 위해 일종의 추리로 얻은 결과에 대해서 그의 증언으로
사실로 확인된 것이 많았다.
우선 그가 수집한 폭과 깊이에서 방대하기 그지없는 그의 자료에서
알 수있었던 것은 제주도를 사냥 왕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제주 섬이 가진 길고 넓은 개사냥의 역사였다.
앞서 개사냥의 전통이 진도에만 남아 있다고 이야기한 나의 생각이
좁은 시야에서 판단 된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돗개가 국견으로서 국민들의 인기를 끌어 왔었고 진돗개의
사냥성을 보존하자는 일부 애호가들의 움직임도 있어서 진돗개의
사냥이 메스컴의 주목도 받아 널리 알려졌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주도 개사냥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옛날 명절 빼놓고는 쌀밥 먹기도 힘들었다는 제주도의
척박한 땅에서 사냥은 제주도민들이 삶을 잇기 위한 몇 안 되는
직업중의 하나였다.
제주도의 수렵 민족 몽골인들이 라이카라는 명 사냥개까지
반입해서 생업으로서의 사냥을 더욱 뿌리 깊게 남겨놓았었고
이 풍부한 사냥의 인력이 좀 더 나은
삶과 벌이를 위해 육지의 남해안으로 진출했음을 말해준다.
허 은석씨와의 대화에서 나의 추리 중 다음으로 확인 한 것은
제주도와 남해안 쪽에서만 순종 사냥개의 혈통이 유지 된
기본적인 토대가 되었다는 몽골인들의 유산일지 모르는
애견 사상의 존재였다.
옛 제주민들은 개를 잘 먹지 않았다고 한다.
개는 약용으로 개를 먹는 때는 있었지만 식용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개고기라는 것이 끔찍하게 빈곤했던 한국 농촌에서
어떤 가치를 가졌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를 동네 할머니에게서
들은 일이 있었다.
할머니의 소녀 시절, 집의 개가 앓다가 죽은 일이 있었다.
불교 가정이었던 할머니의 집에서는 오랫동안 정들었던 개를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머슴을 시켜 뒷산에 정중히 묻어주었는데 다음날 보니까
그 개의 묘지가 파헤쳐져 있었다.
놀라서 알아보니 동네의 한 농부가 개를 묻는 것을 보고
그 날 밤에 파내서 오랫동안 고기에 굶주린 가족들을
포식시킨 것이었다.
이 엽기적인 사건 하나만으로도 한국 순종개들의 혈통을 단절시킨
식견 문화가 한국 농촌에 깊숙이 자리 잡고 내려왔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 옛 사회에서 적어도 식량에 대해서는 육지보다
훨씬 형편이 안 좋았을 제주에서 개가 이렇게 대접 받았다는 것은
순종 보존에 큰 기여를 한 몽골인의 애견 사상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제주도의 애견 사상에 대해서 이 글에 덧붙이는 답글이다.
확실히 본토보다 앞서 보이는 제주도의 애견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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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람님, 지금은 아무도 사용않고 있지만 네눈박이 이름을 여기 제주에서는 "늬눈이반둥갱이" 가 본래이름 입니다.
그리고 개를 부를때 멸시하지않고 높여부르는 호칭이 있는데 다큰 성견에게는 "어리머, 어리머" 하고 부르고 강아지를 부를때는 곳, 곳, 하며 부르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개를 존중하는 의식과 방법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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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출륙 제주도 사냥꾼의 이야기까지 들어갔다.
허 은석씨는 옛날의 이야기는 잘 모르겠지만 일정시절 제주도에서
개를 데리고 전라도 일대에서 개사냥을 하다가 돌아온 어느
개 사냥꾼의 일화도 소개해주었다.
비록 단순한 에피소드였지만 현대의 제주 사냥꾼이 이익에 따라
육지에도 출렵할 수도 있었다는 이 일화는 옛날 남해안 일대에
진출한 제주도 사냥꾼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서쪽에 상당히 기울어 졌을 때까지 술을 서로 권하며 마시며
하다가 보니 이야기는 돌고 돌아 다시 그의 검정 강아지
검돌이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과거에 제주에 네눈백이 개가 많아서 개를
'늬눈이반둥갱이'이라고 불렀다는 말도 들려주었다.
내가 전번에 와서 만났던 애월읍 기사와 꼭 같은 이야기였다.
이 때 허 은석씨는 내가 난생 처음 듣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 제주에서는 청개를 제일로 칩니다. ”
“ 청개요 ? 푸른 개를 말합니까 ? ”
“ 아까 검돌이 같이 생긴 놈을 말합니다.”
나는 그때야 청삽사리의 호칭이 떠올랐다.
“ 아-! 흑구를 말씀 하시는 겁니까?”
“ 네. 육지에서는 흑구라고 하는 모양이군요.”
제주개 네눈백이 청개
나는 파장이 슬슬 가까워져 오는 술자리에서 또 다시 금싸라기 같은
정보가 나올 것 같아 침을 꿀꺽 삼켰다.
“ 제가 제주개 정보 수집차 산간 지역를 돌아 다니면서 사냥에 경험
많은 몇몇 노인 어른들에게서 이구동성으로 들은 소리 입니다.
청개라고 해서 전신이 새까만 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검돌이처럼
등은 검고 배와 다리는 황색인 그런 개가 진짜고 사냥도 잘 하는
개라고 합디다.”
“ 그런 개를 불랙 엔드 탠이라고 합니다. 진도개에도 그런 개가 있는데
흑구라고 한다고 아까 말씀 드렸지요.”
“ 네. 그래서 검돌이를 얻은 것이 나에게 행운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기르려고 합니다.”
나는 가슴에 북 받히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술기운을 덮으면서 밀려오는 감정의 격동을 자제하느라 지는
석양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이 말, 이와 꼭 같은 말을 거의 20년 진송이와 처음으로 만나던
진도 해변의 한 마을에서 동료의 삼촌으로부터 들었었지 않았던가 !
흑구가 원종이라는 것, 기질이 제일 강하다는 것,
두 가지 사실이 진돗개의 조상이 몽고 개라는 정보가 결합되어
나를 그 길고 긴 진돗개 조상 찾기에 나서게 했었다.
꼭 같은 말을 진도와 제주도에서 들을 줄은 나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진도의 산과 들에 뿌려졌던 라이카의 전설은 이 제주도의
산간 지방에서도 어김없이 안개 같이 남겨져 대에서 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진돗개 흑구- 아래 라이카와 제주청개와 비교해보시기 바람
800년 전, 한반도 끝, 제주 땅에 주인을 따라 발을 들여놓은
자신들을 보호해 주던 몽골 주인들이 이 땅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뒤에도 그 실력 하나만으로 꿋꿋이 버티며 힘들게 힘들게
생존해 오다가 결국 그들의 주요 무대였던 제주도와 진도에
유전인자에 각인시킨 그 검은 색깔과 간접적인 명성을 남기고
사멸해버린 몽골 라이카의 운명에
숙연해지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의 시작이 되었던 새벽안개 자욱했던 진도의 바닷가와 이제
이 긴 조사의 끝을 마무리하는 제주도 석양이 어리기 시작한
제주 바닷가가
모자익된 파노라마 같은 배경으로 네 눈박이 몽골 라이카와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진송이와 새로 태어난 검돌이가 뛰어 노는
환상도 젖어 보다가 술잔을 들었다.
나는 감회가 또 다시 북받쳐 올라 울음이라도 나올까 걱정이 되었다
“ 허 선생. 진도의 흑구들과 제주도의 청개들 앞날을 위해서
건배 합시다.”
몽골 및 러시아 라이카-흑구와 청개와 비교하시기 바람
두 사람의 술자리는 이것으로 끝났고 진돗개 조상 찾기도 이렇게 해서
대 장정의 막을 내리고 끝난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진송이 때문에 맺어진 몽골과의 인연은 아직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거의 여덟 달이 다되어 나는 생각지도 않은 사적인 일로 제주도를
다시 찾게 되었던 것이다.
어제 이 글을 보신 몽골의 선교사님이 인근 농장에 가서 찍어 보내신 몽골 라이카 사진.
약간의 혼혈이 있는듯 하지만 몽골 라이카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글 말미에 보내주신 사진들이 더 있다.
일을 끝내고 나는 미리 연락해둔 허 은석씨 집을 다시 찾아갔다.
그 사이 청개 검돌이는 몰라보게 자라 있었다.
집안 여기 저기를 달리며 뛰어 노는데 여간 동작이 빠른 것이 아니었다.
진돗개보다 빠른 그 경쾌한 몸놀림은 날렵한 체구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허 은석씨 말에 의하면 검돌이는 아직 한살이 안 되었는데도
사냥개의 특성이 왕성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단지 아기 때 있었던 눈 위의 누런 점이 면으로 넓게 퍼진 것이
조금 섭섭했지만 라이카나 진도의 흑구도 이런 넓은 점이 있으니
별 다르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제주도 네눈백이 청개- 앞 진돗개 흑구, 라이카와 비교해보시길
나는 그 집에서 허 은석씨의 자료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한 참고가 될 자료를 발견하고 이 메일로 보내 주기를 부탁하자
그는 쾌히 승낙을 하였다.
글이 나간 뒤 허은석씨가 추가로 보내준 제주 청개 사진- 제주개중
청개는 아주 드문 편이다.
이틀 뒤 허 은석씨로부터 메일이 왔다.
나는 그의 ID가 ‘푸른 늑대’인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에게 전화를 했다.
“ 이 ID의 뜻이 뭐지요 ? ”
허 은석씨는 쑥스러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 원래는 ID를 청개로 하려다가 이상해서 푸른 개로 바꾸었다가
그 것도 주위에서 말려서 개 대신 늑대로 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 기이한 인연에 대해서 놀람을 금치 못했다.
푸른 늑대는 세계를 주름 잡았던 징기스칸의 별명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심정적으로 이렇게 믿고 싶었다.
몽골 주인들을 따라 이곳 외딴섬 제주도에 이주한 라이카,
이 라이카가 자기들의 존재를 후손들이나 사람들의 구전에만 남기지
않고 저희 민족의 영웅을 빌어 하등 몽골 사람들과 관계없는
현대의 인간사에까지 그 흔적을 남긴 것은 아직도 라이카들의
혼이 이 남해안 땅에 그 전설만큼이나 떠도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련가하고 -----
--大 尾--
이글을 씀에 또 연변대학교 심경호교수와 부인 오금복씨의
사진 도움을 받았고
특히 4부의 모든 사진과 취재는 제주도 소방서
허은석 씨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았다.
세분께 감사드린다.
더해서 육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개에 대한 특집을
곧 꾸밀까 한다.
이 글이 나가고 몽골에 계신 선교사님이 몽골의 라이카견
사진들을 직접 찍어서 보내 주셨다 .
말씀하시기를 더 크고 잘 생긴 라이카 견도 있고 이놈은
약간 혼혈견 같다는 것이다.
아래에 그사진들을 소개하고 그중 하나는 본문에도 삽입 하겠다.
타국땅에서 선교 사업에도 바쁘실텐데 이런 신경까지 써주셔서
무어라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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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동아일보 기고 글 (0) | 2008.11.22 |
(펌)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 - 제 3 부 (0) | 2008.11.11 |
(펌)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 - 제 2 부 (0) | 2008.11.11 |
(펌)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 - 제 1 부 (0) | 2008.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