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리 12 .서울 나들이의 첫 성과. 조사의 결과는 투자에 정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 뒤 주말은 물론 틈만 나면 서울의 유수한 도서관을 오가며 가능한 자료를 긁어모았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서울을 오가며 도서관을 뒤지는 양적인 노력을 되풀이 해가자 역시 땀의 결실은 보이기 시작했다. 질적으로 유용한 자료가 내 조사 노트의 페이지 수를 늘려갔다. 자료 조사를 통해서 먼저 밝혀 놓을 사실이 있었다. 기존의 모리 가설을 부정하는 롬보 참사관의 판단을 또 한 번 거꾸로 부정 할만한 고대 한국만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모리가 추정한대로 제주의 라이카들도 말들을 따라 진도로 올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뒷받침해 줄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에서는 제주 라이카가 양을 돌보기 위해서만 목장에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한국에는 호랑이나 늑대보다도 더 고약한 야수들이 항상 말 목장 근처에 우글거렸었다. 이들 야수들로부터 말들을 지키기 위해서 충실한 개의 보호가 필요했다. 야수들은 물론 말 도둑질을 수지맞는 사업으로 알고 있었던 인간들을 말한다. 말이나 소는 옛날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가진 고가[高價]의 동산이었다. 말과 소는 빈곤한 농촌 가정의 비할 데 없이 값진 재산 목록 일호였다. 더구나 다른 장물과 달리 네 다리가 달려있어 도둑질해 가기도 쉬웠었다. 그러니 말이나 소도둑들이 발호 했었던 것이 당연했었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이들 말 도둑 떼가 너무 설쳐대서 말 기르기를 기피하는 백성들이 속출해서 그때만 해도 국가의 기간산업이라 할만한 말목축업이 타격을 입기도 했었다고 하고 있다. 이들 말이나 소도둑 떼를 붙잡으면 공범은 이마에 말 도둑이라는 문신을 새겨 줬고 주범은 즉시 앞에서 곶이나 섬 등에 말 목장을 설치했었던 이유에 호랑이들의 극성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었는데 말 못할 이면에는 이런 도둑들의 존재도 계산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말 목장에 개라는 파수꾼은 필수적이라고 수긍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생각에 한동안 매달렸었다. 그러나 한참을 생각해보니 도둑쯤이야 개가 짖어주기만 해도 되니까 동네에서 구할 수 있는 잡견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모리가 말 한대로 제주도로부터 라이카가 따라 나올 이유가 없을 듯 했다. 이 점 나중을 위하여 미리 밝혀둔다. 긴 연구 끝에 일단 부정적으로 본 모리의 가설은 역시 부정적으로 결말이 났다. 아니 더 나아가 추측 수준의 기존 진돗개 조상설을 전적으로 무시하기로 했다. 그간 조사를 하면서 점점 확신이 더 얹어져 가는 진돗개 조상 찾기의 한 요소가 머리를 차지하고 들어와 나의 연구 방향에 새로운 방향 전환을 계속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 견종[犬種]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서 정착하는 데에는 수량적인 투입이 필요 하다는 원칙이었다. 이것은 어느날 박 선생으로 유년 시절 자기 마을의 양조장 집에서 잡종 개만 있었던 그 마을에서 순종개의 피를 얻기 위해서 그러나 세월이 한참 흐르고 군복무를 마친 그가 인사차 고향에 찾아가 본바 그 세파트의 자손들의 흔적은 여기 저기 보였지만 양조장집은 물론이고 동네 어디에도 순종 세파트는 없더라는 이야기였다. 박 선생은 위의 자기 경험을 들려주면서 이런 이야기 했었다. “ 맑은 물에 잉크 몇 방울을 떨어뜨려 보라고. 잉크 방울은 흔적도 잡견들의 바다에 그저 던져진 순종의 운명이 그런 걸세. ” 지금 생각해 봐도 무릎을 칠만큼의 명언이었고 이 말은 나의 진돗개 조상 찾기에 중요한 이정표를 제공해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의 논리로 기존 학설들이 말 한대로 몽골인 부대나 진도인 포로,그리고 제주도 목장에서 가져온 단지 몇 마리의 이것은 마치 오늘날 한국에 있는 수많은 세파드들이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세파드가 한국에 인기 견종[犬種]으로 자리 잡기까지 앞서의 세파드의 예에서 보듯 어떤 견종이 타지역에 유입되어 자리를 잡기까지는 숫적으로 풍부한 유입이 있어야 한다, 즉 다시 말하면 순종 보존은 수적[數的]인 투입과 비례적인 수량적 투입은 또 장기간의 시간을 요하는 프로세스이기도 하다. 위의 사실들은 진도에 유입되어 진돗개의 조상이 된 라이카는 상당한 숫자였었고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 이 라이카를 공급해준 공급기지가 몽골이 아닌 진도 근처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런 곳은 몽골 인들이 살았던 제주도 밖에는 있을 수가 없다. 14.출륙[出陸]제주민들과 동행한 라이카. 위의 가설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그 무렵의 제주도가 몽골인이 다스렸던 몽골령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크다. 제주도에 온 라이카는 비록 소수였었는지 몰라도 그들을 제주도에서 기른 주인들이 애견 문화라면 지금도 세계가 알아주는 몽골인들임에 주목해야 한다. 몽골인들은 개를 말과 같이 평생을 한 식구로 사랑 하다가 죽으면 애도 속에 정중히 장사 지내준다. 그들에게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가 힘든 그 것이 오늘의 몽골에 마스티프니 라이카니 하는 순종개의 혈통이 왕성하게 보존된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 몽골인들이 갖는 독특한 애견 문화의 분위기에서 숫자가 여기서 되돌아본다면 기존 설들. 아니 기존 추측들은 어떤 과학적인 입증은커녕 논리적인 근거도 없이 진도와 몽골을 관련짓는 역사적 사건에 진돗개의 조상설을 억지 춘향이식의 바느질로 기워 맞춘 것에 지나지 않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롬보 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진돗개 관련 책자나 신문 또는 일반 잡지들에서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정설인양 심심치 않게 소개되는 위의 기존 설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주도에 관심을 집중하기로 했다. 조사의 포커스를 제주도로 맞추고 계속 서울의 유명 도서관들을 들락거려보니 나의 가설을 입증해줄 중요한 실마리들이 손에 잡혔다. 지정학적으로 과거 진도와 인근 강진은 제주 육지간의 사람과 물자가 부단히 거쳐 가는 길목격인 교역 항이었다.. 이곳이 갖는 교통의 가치는 고려 공민왕 때 제주도의 몽골 목부들이 일으킨 반란을 토벌한 최영의 부대 25,000명이 제주를 향해 발진한 곳이 이 곳 진도였음이 제주도가 해방 후 미 군정청이 도[道]로 승격시키기까지 전라남도의 일부로서 같은 지역 생활권이었음은 제주와 진도의 지근성이 역사를 두고 이어져 왔음을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제주도와 진도 인근은 바다가 갈라놓았지만 그런 만큼 제주 사람들의 내왕도 많았었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제주도 주민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육지로의 이주를 향한 노력은 우리가 제주 라이카의 진도 유입에 크게 역사는 살기 힘든 제주를 떠나 육지로 유랑을 떠난 제주민의 무수히 기록해놓고 있다. 그들 역사의 기록 중 하나를 소개해보자. 중종 35년 조선 실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 전라도 관찰사 윤개 [尹漑]가 아뢰기를, ‘’‘’‘’‘제주는 토질이 척박해서 백성들이 살기 싫어하여 이주해 많고 쇄환 돼 가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이어서 윤 은보등이 당상관등과 의논하여 아뢰기를,
’‘’‘’‘’‘제주의 세 고을은 주민들이 날로 유망하여 고을이 거의 빌 지경에 이르렀기에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육지로 이주해온 자들을 일체 쇄환하여 모두 원적에 환원 시키게 하였습니다. ‘ 일제시대 먹고 살기 위하여 남부여대하고 만주로 떠난 민족유랑의 역사가 이미 훨씬 전의 남쪽 바다를 무대로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집단으로 육지로 이주해 살던 자취가 깊지 않은 나의 조사에서만도 내륙 깊숙한 곳인 전라도 고창의 흥덕이라던가, 평안도 선천에서 사나흘이나 걸리며 그 때에는 조선 땅인지 중국 땅인지 당국도 잘 알지 못하던 요동반도 밑의 해랑도 [海浪島]라는,아득히 머나먼 곳 등에서 발견되었음을 생각해보면 바다 건너 최단거리에 [註: 객담 한마디. 제주도에는 이어도 또는 파랑도라는 유토피아 섬이 제주도와 중국 사이에 있다는 오래된 전설이 전해져 왔었다. 이 전설을 믿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군함을 보내 파랑도의 실체를 수색한 바 있었다. 해랑도(중국령)의 중국어 발음은 하이랑도이다. 파랑도와 비슷하다.무슨 연관이 없었을까?] 모리가 만약 고려와 조선의 대를 거쳐 반 천년 넘는 세월에 걸쳐 이렇게 남해안 일대에 이주해온 수많은 제주민을 따라서 제주 라이카가 진도로 왔을 가능성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감히 진도의 말 목장을 가지고 엉뚱한 추측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5.새로 나타난 테마 - 순종 보존. 수량적인 면에서 허점을 들어 낸 기존 학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제주에 집중하기로 한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일단 조사의 또 다른 한 방향을 새롭게 잡았다. 그 것은 수량적인 투입이 있어야만 한 지역의 순종이 보존될 수 있다는 원칙을 발견한 것이 한 계기가 되었다. 더해서 인상 깊게 들었던 박 선생의 세파트 이야기는 나의 새로운 관심을 더욱 생생하게 부추겼다. 새로운 화두는 양적인 유입에 더해서 순종 보존을 위해서는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질적인 문제였다. 제주 라이카들이 수 백년의 세월을 두고 진도에 이주하여 진돗개의 조상이 되었다지만 진돗개라는 순종이 보존되게 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몇 달이 되던 어느 날, 나는 독특한 한 현상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한반도의 육지에서는 풍산개나 삽살개등 불과 두 세종의 순종만이 발견되었는데도 한국의 남해안 일대에서만 여러 종류의 순종 견들이 출현했었다. 이들에 대해서 더 깊이 들어 가기 앞서 이야기의 배경이 될 만한 좀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한국의 순종 견은 아주 드물었다. 순종 견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보존했으면 오늘날 진돗개나 풍산개와 같은 명견이 되었을 한국의 개들이 한반도 곳곳에서 그런 대로 명맥을 유지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 볼 길이 없다. 순종 보존의 이유가 없었고 또 따라서 순종 보존의 노력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 사례를 소개한다. 20 세기 초 미국에서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끈 “야성의 부름”이라는 베스트 셀러가 있었다. 개와 이리 사이에 탄생한 벅크라는 개를 주인공으로한 작품으로 얼래스카가 무대이다. 몇 년 전 이 작품이 영화화되어서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었다, 지금도 비디오 점에 가면 볼 수 있는 늑대 개라는 제목의 작품이 그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문학사에서 비중 있게 평가받는 그는 러일 전쟁 때 종군 기자로서 한국 북쪽에 와서 러일 전쟁을 취재했었다 그가 남긴 종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1904년 평양 북쪽 순안을 지날 때 그가 본 것을 이렇게 기록했다. ‘ 한국의 개들은 꼭 개하고 이리를 섞어 놓은 것 같다.-------- 대부분의 개들이 썰매를 끄는 크론다이크의 개와 마치 형제처럼 닮아있다,----그리고 허드슨 만에 사는 개와 비슷한 것도 다른 사람이라면 무심히 넘겨 버릴 이 �은 글은 한국 동물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19 세기 말 얼래스카 개척이 붐을 이룰 때 전초 기지가 이 주변의 개들은 한국의 애견가들이라면 알만한 허스키나 마라뮤트 이 개들은 매스컴에서도 자주 소개되는 썰매를 끄는 개들로서 삼각형의 귀와 말리거나 고추 선 꼬리가 특징인 북방 견들이다. 이런 진돗개들과 비슷한 개들이 불과 100년 전도 안 되는 시기에 그러나 지금 삽살개와 풍산개를 제외하고는 이런 개들은 순종을 중시하거나 보존하는 애견 감각이 우리 민족 문화의 티끌만한 구석에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 아쉬운 점은 내가 진돗개의 조상을 찾는 긴 세월 내내 통감하던 바였다. 한국 야생 동물기 저자 이 상오 씨는 그 이유를 한국인들의 온대 지방에서 개를 식용으로 하는 몇 안 되는 민족중의 하나가 살던 한반도는 과거 애견 문화라는 것 또한 희박하기가 세계의 으뜸인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 지역인 한반도에서 태어난 개들의 운명은 거의 인간들에 의해서 식용을 위한 타살로 끝장이 나기 마련이었다. 한반도 견공들의 주된 운명이 식용일 바에야 개가 순종이건 잡종이건 그것은 기르는 인간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개의 우수한 혈통을 보존한 어떤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고 그 결과가 오늘날 한국을 순종 견 보유 빈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앞에 잠깐 언급한 바에서 제주도에 이입된 소수의 라이카가 그러나 여기에 예외적인 이변이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 한반도 본토의 사정이 이러 했었는데도 진돗개, 제주개, 완도개, 거제개, 해남개등등,순종 빈국인 한반도 면적의 수십, 아니 수 백분지 일밖에 안 되는 좁은 이 지역에서 이토록 많은 순종 개들이 출현했다는 것은 확실히 이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들 도서 지역에서의 순종견 보존 이유를 외부와의 왕래가 없었으니 이 지역의 재래종 개들이 다른 종의 나는 이 말에 의심이 갔다. 무엇보다도 순종 견들이 살았던 이 들 섬들은 육지와 맞 그래서 섬이 갖는 고립성을 이 섬들과 엮어서 이들 섬에 들어가 보면 섬이라고 느낄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섬 안과 섬 밖의 교역도 활발하였다. 만약 섬의 고립성이 순종 보존의 이유가 된다면 왜 추자도니 흑산도니 하는 더 멀고 더 고립된 섬들에서는 순종 견의 자취가 안 보이느냐가 문제가 된다. 따라서 순종 보존의 이유를 섬의 고립성에서 찾는 것은 이들 섬들의 지리적 연구를 면밀히 해보지도 않은 안이한 태도라 아니 할 수가 없다. 16. 미스테리의 순종개들. 어쨌든 한반도에서도 이들 섬들에서만 순종 견들이 배출된 이유는 미스테리였었다.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 미스테리한 현상을 풀어 보는 것이 모르긴 해도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오면서 형성된 특유의 육감이 나는 자연스럽게 진돗개 조상 찾기라는 직접적인 과제 풀이보다 어느 날 밤 그 사이 뜸했던 박 선생이 나의 집을 찾아 와서 영어로 써진 미국 동물 잡지의 기사를 내놓으며 번역을 부탁했다. 나도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젊었기에 아무래도 박 선생보다는 나았다. 며칠 뒤 힘들게 번역을 마친 그 기사를 그에게 넘겨주는 자리에서 나는 나의 조사에 새롭게 나타난 테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단순하게 받아 들였던 제주 라이카의 진도 이입의 경로가 말 목장 설치와 제주개의 이입에 따른 것이라는 기존의 추정이 산산이 깨어져 버린 사실과,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진돗개라는 순종이 보존되어온 이유와 남해안에서만 순종 개들이 다량 출현한 이유 등이 새로운 과제로 등장했음을 설명해주었다, 박 선생은 콧등을 열심히 문지르며 나의 말을 심각한 표정으로 들었다. 콧등을 문지르는 것은 그가 깊은 생각을 할 때 자주 하는 버릇이었다. 나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 말이 되는군. 그 것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진돗개 조상 찾기보다 더 중요한 일 이 될지도 모르겠구먼 !“ 우리 둘은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결론은 비슷하게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박 선생은 순종 보존의 이유를 기존의 추정인 섬의 고립성에서 어떤 단서를 찾으려 했었고 나는 나대로 담백질의 공급원인 해산물이 이 지역에 풍부해서 개 도살을 구태여 담백질에 굶주린 육지 주민처럼 심하게 할 필요가없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내놨지만 둘 다 마땅한 해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밤은 깊었고 우리는 미진한 생각을 머금고 헤어졌다, 며칠이 지난 오후. 모처럼 사무실 근무를 하게 된 나는 점심 뒤 나른하게 찾아오는 졸음과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점차 스믈스믈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나를 터지는 전화벨 소리가 잡아 챙겼다. 수화기를 통해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는 박 선생의 것이었다, 나의 졸음이 도망 갈 만큼 긴장된 어조였다. “ 서 과장 ! 우리가 왜 남해안 일대에만 순종 개들이 잘 “ 네. 그랬지요.” “ 내가 며칠 간 생각해보니까 말야, 한 가지 단서가 잡히더라구.” “ 뭔데요 ? ” 나의 목소리도 긴장되기 시작했다. “ 이들 남해안의 개들이 전부 사냥개들이란 말일세 ! 진돗개도 그렇고 일정 초기까지 사냥개로 진돗개보다 박 선생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계속했다. “ 남해안의 다른 개들, 다시 말하면 완도개나 해남개도 자네가 완도개나 해남개가 진돗개와 비슷하다는 말은 내가 진송이를 “ 서 과장 ! 이들 순종개의 사냥 능력이 크게 필요했던 사냥이 이 지역에서 유행했었고 그 덕분에 이들 개의 혈통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거야. 섬이니까 물,또는 어업과 관계 있는 리트리버나 뉴 파운드랜드와 같이 물 좋아하고 수영 잘하는 개가 탄생하지 않고 왜 섬과 별다른 관계가 없는 사냥개들이 나왔는가 하는 점에서 당신의 추리가 출발해야 한다고 ! ” 천만 뜻밖의 그 의견은 캄캄한 암흑을 훑은 번개의 섬광처럼 갑자기 나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한편으로는 하등 진돗개와 아무런 관계가 없던 박 선생이 기발한 “ 맞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저도 사냥개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한번 연구를 해보겠습니다.” ‘ 이 테마를 잡아들었다. 틈만 나면 진돗개 생각으로 지새던 나의 두뇌는 본능적으로 그간 축적된 정보를 검색해 들어갔다. 몇 초만에 박 선생의 말을 뒷받침하는 정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개를 데리고 짐승을 사냥하는 개사냥, 다른 이름으로 말하자면 넉 사냥이라 부르는 사냥이 그 미약한 명맥을 유지해온 곳은 현재 남해안에서도 순종 사냥개중 혈통이 끝까지 보존되어왔던 진도다. 물론 야간에 진돗개를 앞세우고 노루나 너구리를 잡는 밀렵 수준의 개사냥은 지금도 육지의 산간 지대에서 행해지고는 있다. 그러나 사냥개의 사육이나 사냥술이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축적된 곳은 오로지 진도뿐이다. 더해서 진도에 숱하게 전해 내려오는 개사냥의 흥미로운 일화들은 가히 진돗개 순종 보존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일이다. 진도에 내려오는 여러 일화 중에서도 좀 더 사냥 능력 높은 사냥개를 얻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적지 않았던 것 역시 박 선생의 가설을 입증 해주는 것이라 할 만 했다. 좋은 사냥개를 얻기 위한 노력은 결국 우수한 혈통의 순종 보존이라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더해서 개의 순종 보존에 사냥이 기여했던 사례가 비단 진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릿속의 검색이 밝혀냈다. 내가 사는 속초 인근에는 풍산개의 고향 개마 고원에서 피난 내려온 풍산 군 출신 실향민들이 소수나마 살고 있다. 나는 그들 중의 하나로서 수산업을 하는 최 사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해방 뒤 북한 땅에서는 최초로 조직되었던 반공 유격대인 개마고원 유격대의 일원이었다. 나는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한 80년대 중반 그와 만나서 안면을 그는 고향인 개마고원에서 어린 시절부터 풍산개를 남한에서 풍산개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던 그 무렵에 나는 그로부터 풍산개에 관한 다량의 정보를 얻었었다. 풍산개의 외모가 우리가 생각하듯 진돗개와 같이 귀가 빳빳이 선 북방 개형이 아니라 90 퍼센트 가까이가 바둑이와 같이 귀가 꺾인 바둑이 형이라는 사실을 안 것도 이분에게서 이었다. 나는 녹이 슬어 가는 기억의 한구석에 박혀있는 그의 말을 출력해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 개마고원처럼 사냥꾼들이 많은 곳도 드물거야. 일정 시대처럼 엽총의 소지허가가 나기도 힘든 때였는데도 개마고원 부락마다 그는 또한 많은 수의 포수들이 풍산개를 길렀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 풍산개를 범 잡는 개라고 하는데 그 건 허풍이 아니야. 나는 포수에게 총을 맞고 부상당한 표범을 물어 죽인 풍산개를 직접 본 일이 있지” 줄여서 말한다면 풍산개는 개마고원에서 행해졌던 대규모의 수렵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그 혈통이 보존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쯤의 정보라면 한국 순종개의 혈통 보존과 사냥과의 연관 관계를 입증해주는 또 다른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색 끝에 박 선생의 말이 맞는 말이라는 최종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가다가 돌출적으로 나타난 순종 보존에 관한 문제를 거의 다 푼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었다. 본래 계획대로 진돗개 조상 찾기의 또 다른 단서를 이 발견에서 얻어내야만 했다. 그 단서는 상상외로 하루도 안 되어서 발견되었다. 17.남해안 사냥개들의 공동 조상 제주 라이카. 그 날 밤 무겁게 찾아든 낮의 화두는 퇴근 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머리를 짓눌렀다. 남해안 개들이 사냥개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무슨 단서를 찾으려면 이 궁리 저 궁리로 시달리던 나의 머리는 엉켜진 실타래처럼 나는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정리 할 겸, 나는 오래 간 만에 이 상오 씨가 썼던 한국 야생 동물기를 꺼내 들었다. 나는 박 선생 책을 복사해서 만든 이 책을 뒤척이며 남해안 일대의 순종 개들을 소개한 부분을 찾았다. 말했던 대로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출판물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 토종개와 관계된 희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책 말미에 10여 페이지 정도 간단히 소개한 그 내용은 너무도 간단해서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는 것이 흠이다 나는 행여나 하는 기분으로 그 부분을 열심히 뒤져봤지만 남해안의 개들이 한 사냥에 관한 아무런 소개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자정이 될 때까지 이 책의 여기저기를 뒤적이다가 헛된 노고임을 깨닫고 책을 덮었다. 다시 잠자리에 든 나는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그 순간. 감은 눈의 망막 위를 그 책의 한 구절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남해안의 대표적 개라는 제주개 거제개 진돗개 세 종류의 개에게서 한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 책은 제주개를 대형 개, 거제개를 중형 개, 진돗개를 소형 개로 분류했다고 앞에서 밝힌바 있다. 크기는 달랐지만 이들의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거제개는 거제개대로 검은 색이었으며 진돗개에도 나의 맥박이 잠을 쫓으며 빨라지기 시작했다. 진돗개와 제주개는 검은 색인 것이 당연하다해도 거제개까지 검은 색인 것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언뜻 보기에도 검정개들인 제주개- 진돗개 -거제개 사이에는 무슨 연결고리가 있어 보였다. “ 그렇다면 ?!” 하루 종일 머리 속으로 쫓던 순종 보존의 이유라는 화두는 이미 사라지고 두뇌는 뱅그르르 회전을 해서 각 섬개들을 묶는 연결 고리라는 화두를 붙들었다. 그렇다! 내 사색의 벽을 밀어 찢듯 번쩍하고 나타난 정보가 있었다. 그간 서울을 오르내리며 모아놓은 자료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진도와 마찬가지로 거제도도 고려 말과 이조 초에 바다를 건너온 왜구들의 극심한 내습과 약탈에 시달리던 곳이었다. 이들에게 시달리던 전 거제도민들은 조선 태종 때 결국 살길을 찾아 섬을 버리고 경상도 거창 등지로 이주를 해야 했었다. 세종 때가 되어서야 겨우 남해안에 왜구들의 발호가 잦아들고 일부 거제 이주민들이 거제도로 되돌려 보내져 옛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사람은커녕 개도 살지 않았던 공도화[空島化]정책이 한 세대이상이나 계속되었을 바에야 검은 색의 거제개는 진돗개와 같이 조선 초에 외부로 부터 도내[島內]로 유입 되었다고 봐야 한다. 외부란 의심 할 바 없이 검정개가 살고 있는 제주도 외에 위의 자료들을 가지고 한발 더 앞서 가서 판단해보면 제주의 라이카는 진도에만 온것이 아니라 남해안 전역에 확산되었었다는 결론은 당연히 나온다. 더해서 나는 여기서 한 사실에 주목했다. 앞에서 제주도와 가까웠던 관계로 물자와 사람의 교류가 많았던 진도와 그 인근에 먹고 살기 힘든 제주를 떠나 육지로 이주한 제주민이 제일 많이 정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소개했었다. 남해안에서 발견되는 순종개들, 진돗개, 완도개, 해남개, 거제개중 사분지 삼인 세 종류의 순종 개가 바로 제주와 동일한 지역 생활권일 수 있는 이 지역에 몰려 서식했음은 라이카의 전 남해안 전파 가능성을 말해주는 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진도 한 곳에 국한되지 않고 전 남해안에 공통되는 그 무엇, 즉 순종들이 보존되게 하는 원인, 또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순종 보존의 이유라는 곁가지를 쫓아가다가 찾아낸 개들의 사냥 능력이 여기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것을 느꼈다. 이렇다면 믿어 왔던 대로 제주 라이카가 진도에 들어와 진돗개의 조상이 되었다는 점[點]적인 경로가 아닌 제주 라이카가 그 사냥 능력 때문에 진도를 포함한 전 남해안 일대에 퍼졌다가 그중 진도에서만 라이카의 후손이 살아 남았다는 면[面]적인 경로 탐사가 진돗개 조상 찾기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그렇다면 다음으로 할 일은 진돗개 조상 찾기의 연구를 위해서 제주 라이카가 남해안에서확산 되었던 이유가 되었던 사냥이라는 테마의 내용을 자세히 밝혀봐야 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나는 생각 밖으로 빨리 나타난 이 행운의 발견에 감사하면서도 밤새 잠을 설치며 머리를 짜내다 아침이 되자 식사도 거른 채 그 날 하루는 업무를 거의 못 볼만큼 나의 머리는 온통 진돗개 생각뿐이었다. 저녁 무렵 남해안 개들이 사냥 개였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두 개의 연구방침을 잡았다, 첫째, 남해안 일대에 순종 사냥개들을 남겨 놀만큼 왕성하게 행해 졌던 사냥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 둘째. 이 사냥에 왜 라이카가 요구되었던가? 라이카의 무슨 능력이 남해안 사냥꾼들에게 그렇게 크게 평가되었고 또 요구 되었었던가 ? 답보 상태에 있었던 나의 연구는 새롭게 닦은 활로를 향하여 물론 그 전의 연구가 그랬었듯 역시 당장의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석 달쯤 세월이 흐른 뒤 다도 해상 국립 공원에 출장을 갈 기회가 왔다. 실로 진돗개 흑구 진송이를 데려온지 9년 만의 남해안 출장이었다. 나는 상사의 양해도 얻고 주말을 잘 활용한 출장 계획을 세워서 삼일간의 여유를 만들어 냈다, 나는 이 여유 기간을 틈타 옛날 남해안에 크게 행해졌을 사냥의 출장 업무를 대강 끝낸 나는 가장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나는 진돗개의 조상을 찾는 조사활동의 결과로 통해 진도에 진돗개 중에서도 특히 사냥능력이 특별히 뛰어난 진돗개들만을 개발해서 키우는 나이든 분 서너 명과 교류를 맺고 있었다. 나의 글에서 인용한 많은 정보가 이들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진도를 종횡으로 누비며 이들을 만나 조사 활동을 한 것은 물론이고 지역 역사나 지리에 관련 정보들을 모았다. 사흘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수집활동을 했으나 실망스럽게도 내가 설정한 두 개의 의문 사항을 풀어줄 해답은 없었다. 서울행 직행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나는 적이 막막함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는 황혼녘의 고속도로를 계속 질주하여 수원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고속 도로 옆의 국도 위에 큼직한 말을 실은 작은 트럭 하나가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네 다리를 묶인 말은 흔들리는 차의 요동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내가 탄 직행 버스와 평행으로 달리는 그 희한한 모습을 몽골 대사관의 장지브르도즈 롬보 참사관까지 이르게 했다. 나는 진돗개 연구의 한 계단을 마련해준 그를 다시 한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리의 가설을 부정하게 만든 정보를 나에게 준 그는 같이 한 점심 자리에서 그 외에도 그가 고향의 말과 양 이야기를 비롯해서 어린 시절의 여러 이야기들을 나에게 했었다. 고통스럽게 실려 가는 말을 보면서 구름이 흘러가듯 그의 말들을 무심히 회상해 가던 나는 그 회상이 어느 대목에 이르자 덜컥하고 발 뿌리가 걸린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때 믿었던 가설이 깨진 터라 김이 빠져서 맛 없는 수저질만 해대던 나에게 그는 분명히 말했었다. “ 양고기는 몽골 인들이 하루 세끼를 먹는 주식인데 한국인들은 별로 좋아 하지를 않더군요----- 한국도 세계화가 되어서인가 별별 식당들이 다 생겼는데도 양고기 전문 식당을 거의 보지 못했고 ----- 정육점에 가 봐도 양고기를 팔지도 않고 ----- 제가 너무 양고기를 못 먹었더니 요새는 가끔 고향 생각이 납니다.” 그는 양고기에 얽힌 여러 일화들을 들려줬다. 화제는 고려 때 제주도에 말과 개와 함께 양도 들어 왔었다는 “ 한국 사람들이 좋아했었다면 몽골 양도 멸종되지 않고 제주 말처럼 “ 아쉽군요. 살아 남았으면 몽골의 살아있는 또 다른 유산이 한반도에 남아 있는 것이 되었을 텐데.” 롬보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 먹는 사람이 없으니 길러봤자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돈도 되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도 기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차츰 없어졌겠죠.” 그 때 그는 당장 나의 귓가에 생생하게 살아나는 소리를 했었다. “ 몽골 사람들이 가져온 말이 지금처럼 살아 남아 있는 것을 보세요. 제주도에 가보니 아직도 제주 말은 관광이나 수출용으로 비싸게 팔리고 있더군요. 가축에게 적자 생존이라는 논리로 보아 큰 무기가 되는 상업성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 양은 멸종됐다고 봐야겠죠.” 그는 제주말이 굳이 몽골말의 후예라고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제주말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 그러고 보니 상업성이란 인간의 가축으로서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것 같군요.” 상업성! 즉 기르면 돈이 되는 가축만이 인간들에 의해서 보존되어 바로 전날 진도에서 만났던 진돗개 전문가 최 선생은 이렇게 말했었다. ‘ 우리 집안은 삼대를 내려오며 개사냥도 하고 진돗개도 길러 왔지만 너도나도 개를 길러 너구리나 노루 등을 사냥했었는데 서로가 좋은 사냥개 확보를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했었다. 사냥 잘하는 진돗개는 한 마리에 황소 한 마리 가격에 팔리곤 했다.----‘ 롬보 씨가 한말이나 최 선생이 한 말은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 오로지 인간에게 유용한, 즉 혜택을 주는 상업성 있는 가축만이 대를 이어 혈통을 유지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업성이란 단어가 진돗개 조상을 찾아가는 여정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이 단어를 앞에서 설정한 두 개의 테마에 투입해보자. 즉 남해안 일대에 돈벌이가 되는 사냥이 있었다는 것이며 라이카가 이 돈벌이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제주도의 라이카는 돈벌이를 해주는 귀하신 몸으로 존중을 받으며 남해안 일대로 팔려 나갔다는 말도 된다 . 남해안 일대의 사냥에 관한 희미한 자료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이 새로운 가설에 큰 비중을 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하필이면 이 남해안 일대에만 여러 순종 사냥개들이 나타나게 만든 광범위하고 장기간의 사냥이 행해진 독특한 내가 이 생각 저 생각 잠겨있는 사이 차는 톨 게이트를 지나 석양 속의 서울로 진입을 하면서 조금 뒤 터미날에 도착했다. 나는 생각을 일단 접고 택시로 동서울 터미날로 가서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옮겨 타고 밀려오는 피곤에 눈을 감았다. . 출장 뒤 뜻하지 않게 설악산 중턱에 발생한 산불 때문에 며칠 간 나는 일찍 퇴근한 어느 날, 속초에서 애견 센터를 크게 정 사장은 앞에서 개를 사랑하는 자동차 영업소 소장으로 자유분방한 성격인 그는 상사들의 미움을 받아서 승진도 못하고 변두리 영업소장으로만 전전해 다니며 이것저것 끓어오르는 그러던 그는 일년 전 사표를 내고 부업으로 하던 애견 센터 사업을 본격적으로 키웠다.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를 오른 요즈음 그는 암암리에 진돗개를 한국의 엉성한 수렵관련 법규는 개사냥에 대한 별다른 배려가 그는 너무 사냥에 열중하던 나머지 국립공원 안에 들어와 반갑게 나를 맞은 그와 나는 화제는 금방, 그리고 자연적으로 진돗개 쪽으로 옮겨갔다. 그는 이미 내가 진돗개 조상을 찾는 연구에 매달려 나는 그에게 내가 궁리 중이던 테마를 들려줬다. 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고 개사냥도 좋아하는 그에게서 진도까지 가서 듣지도 못했던 무슨 기발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일루의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 돈벌이되는 사냥이라---- 지금 같아서야 오소리를 잡으면 가장 큰돈이 되지요. 잘만 받으면 백 만원 가까이 벌 수 있으니----- 너구리 값의 열 배는 버는 셈이니까요.” ------------------------------------- 이것은 옛날이야기다 . 지금은 많이 변했을 것이다. ------------------------------------ 그의 대답은 다소 엉뚱했다. 피식 웃는 나에게 그는 얼른 말문을 바꾸어 다른 의견을 꺼냈다. 이번에는 전문성이 다소 있는 의견이었다. “ 러시아에서는 라이카를 호랑이 사냥개로 쓴다고 합디다. 옛날 호랑이가 득시글거릴 무렵 남해안 일대에 호랑이 사냥이 유행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용맹한 제주 라이카가 퍼지지 않았을까요?” 나도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남한에서 멸종해버린 한국 호랑이들이 마지막까지 생존 했던 곳이 그러나 용맹무쌍한 호랑이를 개만 가지고 사냥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개의 뒤에서 강력한 라이플을 가진 포수의 엄호가 활과 화승총 밖에 없는 옛 시절 이런 자살 행위 같은 사냥이 일반화 될 리가 없다. 더해서 조선시대는 호랑이를 잡으면 무조건 관가에서 그러니 호랑이 사냥이 전문적으로 행해졌을 리가 없었다. “ 섬 지방에 무슨 호랑이가 그렇게 많았겠어 ? ” 나의 부정에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갑자기 상을 쳤다. “ 아--! 알겠어요. 섬 지방이라니까 생각이 납니다. 물개 ! 나는 한층 기발함이 더해 가는 말을 내놓는 그의 얼굴을 멍청하게 “ 물개가 말입니다 해변 바위에 있을 때 주력 좋은 개로 전력 즉 물속으로 뛰어들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지요! 해구신 한 개만 얻어도 횡재를 하는 것이니 너도 나도 나는 괴상한 발상에 도취되어 들뜬 그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어야 했다. “ 여보 정 사장! 물개들이 즐겨 찾는 해변은 바위투성이의 험한 곳이야. 개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전력 질주를 한단 말야? 더구나 해구신을 가진 수놈은 암놈을 수백, 때로는 수 천 마리나 거느리는 존재야. 개가 이들 수 천 마리의 물개 떼 중에 멀리서 수놈만 알아보고 쫓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돼 .” 머쓱해진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 생각을 해보는 표정을 취했다. “ 그럼 뭘까 ?” 그러나 별다른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자 그는 소주 한잔을 들이 키고 말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는 서울의 무역상을 통해서 무슨 테리어 종을 수입해서 제법 재미를 봤다는 이야기로 술좌석의 남은 시간을 메웠다. 진도까지의 먼 길 나들이에서도 소득 없이 돌아온 터라 그에게 그러나 나중에 나는 깊이 깨닫게 되었다. 호랑이가 나오고 물개가 나왔던 그와의 길지 않은 대화에서 나는 그때까지 돈 되는 사냥이라는 막연한 목표에서 돈 되는 동물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목표 쪽으로 추적 방향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꾸게 된 것이다. 19. 남해안 꽃사슴 . 추적 목표의 전환은 몇 달 뒤 우연한 기회를 맞아 위력을 발휘했다.. 며칠이 흐른 뒤, 비가 흐느적거리듯 내리는 주말이었다. 집사람과 아이들이 친정집에 다니러 가서 텅 빈 집안에 홀로 남은 나는 텔레비전을 지켜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아홉시 뉴스가 끝나자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밤비 내리는 정원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감상적인 무드에 젖어 보았다 오래간만의 비 오는 밤 경치 구경은 흥취가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감상적인 무드를 갑자기 짖어대는 진송이가 깨놓았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제법 점잖아진 진송이가 짖어대는 것은 비를 피해 집안 처마 밑에 들어온 도둑 고양이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소동으로 흥취가 깨져 밤비 구경을 그만두었다. 또다시 무료해진 나는 방안을 여기 저기 둘러보다가 문득 책꽂이에 꽂힌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눈이 멎었다. 많은 분들이 아시듯 난중일기는 이 순신 장군이 칠 년간 호국의 일선에서 심신을 사르며 싸운 일기 형태의 기록이다. 이 책은 연 전에 시내 중고 서점에 갔다가 사온 것이었다. 난중일기는 이미 대학 시절에 읽은 일이 있었지만 단돈 이 천원이란 가격이 이 책을 다시 사게 만들었었다. 책은 사긴 샀지만 읽어 본 일은 없이 그저 책꽂이의 한쪽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책을 책꽂이에서 빼다가 읽기 시작했다. 늦은 밤에 읽기에 조금은 주의력을 필요로 하는 책을 왜 집어 들었는지 나로서도 이해가 안가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후에 생각해보면 진송이의 짖음이 내가 틈만 나면 빠져드는 진돗개 조상 찾기라는 화두를 건드렸고 그 화두는 나의 깊숙한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먼 옛날 읽었었던 난중일기의 한 대목을 뒤흔들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난중일기의 여기저기를 뒤적뒤적 훑어 지나 같다. 잠재의식 아닌 현재의식으로 대강 읽어보는 책의 내용은 20 년 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새로 대하는 책처럼 그러나 조금씩 읽어 나가다가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저절로 깨달았다. 7년간이나 길게 계속되는 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조선 함대를 이끌고 종횡 무진하던 전장이 내가 관심을 가진 순종의 섬개들이 살던, 아니 제주 라이카가 확산되어나간 지역과 정확하게 일치함을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자세를 바로 할 만큼 주의력을 나의 뇌리 속에 얼마 전 야밤에 일어나 한국 야생 동물 기를 읽다가 한 발견을 했던 감격이 살아나면서 어떤 야릇한 설렘이 1593년 2월20일[음력]의 일기 부분에서였다. 그것은 정말 놀랄 만한 기록이었다. ‘--- 소진포[ 거제도 장목면 ]로 돌아와 밤을 지샜다. 이날 사슴떼가 동서로 달아났는데 순천부사[권 준] 가 한 마리를 (이것도 지금은 상식이 되어있다. 꽃사슴을 이입시켜 부활을 나는 입을 벌리고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다.“ 남해안의 거제 섬에 사슴이 살았다고 ? 그 것도 떼가 살았다고 ? 나는 고개를 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사슴은 한국 호랑이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한국의 대표 동물이다. 강원도나 함경도 같은 깊은 산 속도 아닌 남해안 일대에 그런 귀한 사슴이 살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의 산업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남해안의 실정을 이런 해안 지방과 섬에 사슴들이 살았다니 ! 나는 이 순신 장군이 노루를 사슴으로 잘못 알고 쓰시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아니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점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꼼꼼히 살폈다. 그러나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아 민족의 영웅 이 순신 장군은 결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그 분은 사슴[鹿]과 노루[獐]를 확실하게 구별해서 그때서야 나의 혼란한 머릿속에서 팔 년전 나의 동료와 함께 진도에 차가 진도에 들어서 오르막길에 올라 100 가호 정도 크기로 보이는 어느 마을을 지나갈 때 그 친구가 불쑥 말했었다. “ 여기는 녹진이라는 동네인데 내 또 다른 친척이 한 명 살고 있어. 이번에는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가야겠군. ----- 거기에 녹희라는 귀여운 조카가 하나 있는데 ----아쉽구나.” 나는 녹희라는 여자 아이 이름이 특이하게 들렸다, “ 사슴 아가씨라----. 아주 예쁜 이름인데.” “ 녹진에서 낳아서 녹희라고 이름을 지었을 거야 --이상하게도 남해안에는 사슴 녹[鹿]자가 들어 가는 지명이 많아.” 그는 그때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었다. 나도 그 이상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었다. 바로 그때 버스 속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어서 나의 머리 속에 사슴 녹[鹿]자가 들어간 남해안 일대의 지명들이 연달아 뒤따랐다. 유명한 제주도 백록담[白鹿潭]. 사철 바다 낚시꾼 모이는 녹동항[鹿洞港]. 그리고 슬픔 많은 섬,소록도[小鹿島]등등, 지금으로 보아서는 지역에 어울리지 않게 명명한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을 사슴 녹[鹿]자의 지명들이 연달아 생각났다. 사슴이 살지 않았던 곳에 이런 이름이 붙을 수는 없다는 단순한 논리를 후에 수집했던 정보가 이렇게 보여준다. ----연산군 때 조선 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전라도 수군 절도사 안윤손이 치계하기를, ---- 금월 14일 진도의 사슴 사냥하는 군사와 남도포, 금감도의 당번 선군들이 왜를 만나 군사를 동원해서 사슴을 쫓을 만큼 많은 수의 사슴이 진도 일대에 살았다는 말이다. 진도에 있는 녹진이라는 동네 이름은 그저 근거 없이 주어진 위의 사실을 보면 누구도 난중일기의 사슴 기록은 정확한 나는 이 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한반도에 사는 인간들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더해 주었을 뿐더러 동물들의 역사 연구에도 나는 이 남해안 사슴의 정체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당장 내가 가진 자료에는 사슴에 관계된 것은 없었다. 이미 깊어 질대로 깊어진 심야에 어디 가서 사슴에 대해서 안달이 날만큼 사슴을 생각하고 있던 차 생각이 난 것은 이 상오 씨가 썼던 한국 야생 동물 기였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 책의 어느 곳에선가 사슴에 대해서 소개한 부분을 보았던 것 같은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서가 한 곳에 꽂혀있는 그 책의 복사본을 꺼내 들자말자 급히 여기저기 책장을 넘기며 사슴 부분을 찾아보았다. 사실 그간 사슴은 나의 관심 밖이었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전 두께의 이 책의 사슴 쪽은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보지를 않았었다. 내심 자신이 아마추어 동물 연구가라고 자처하던 나는 나의 무성의함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자세히 읽어나갔다. 있었다!. 바로 남해안 사슴을 설명한 부분이 한쪽 구석에 숨어 있다가 나의 눈길을 빨아 드리듯 나타났던 것이다. 바로 사슴을 설명한 페이지에 지금은 멸종해서 까마득하게 잊혀진 남해안 사슴이 수록(水鹿)이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잠깐, 여기서 한반도에 살고 있거나 또는 살고 있었던 사슴들의 종류를 살펴보고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남해안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 전체에서도 이미 사슴이 살아진지 오래되었지만 한반도에는 두 종류의 사슴이 살고 있었다. 하나는 중국인들이 마록(馬鹿)이라는 불리는 대형 사슴이다. 그래서 중국 동포들은 이 사슴을 말사슴으로 부르고 있다. 한국의 양록 업자들이 미국에서 대량으로 들여와 키우고 있는 엘크 사슴의 아시아 판으로 북한의 함경도 일대는 물론이고 동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 그리고 몽골에 서식하고 있다. 미국의 야생 엘크 보다는 체구도 작고 뿔의 직경도 가늘다 몽골에서는 이 사슴을 관광 사파리의 인기 상품으로 개발해서 미국의 사냥꾼을 유혹하는 외화벌이 사업으로 삼고 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백두산 일대에 살고 있으며 그 곳 주민들은 좀 더 작은 사슴이다. 이 사슴은 우리에게 꽃사슴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대만산 또는 동남아시아 꽃사슴이 많이 수입되고 번식되어 잘 알려졌지만 한국의 꽃사슴은 그 아름다움에 있어 대만산과 꽃사슴 - 매화록 매화꽃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털 색깔의 자태는 오랜 한국 역사에서 그림이나 자수 또는 민담 등에 무수히 등장케 했었다. 영약이라 하는 녹용은 사실 이 꽃사슴의 것을 진짜로 쳤었다. 이 상오 씨는 이 꽃사슴을 강원도 산과 남해안 산으로 나누어 남해안 꽃사슴을 수록으로 소개하였다. 남해안산 꽃사슴은 다른 한반도의 꽃사슴에 비하면 색깔이 엷고 겨울이 되면 모피의 하얀 반점이 없어지고 짙은 다갈색만이 전신을 감싸는 것이 특징이다. 책 속에는 또 다른 일화도 있었다. 근세조선의 왕실에서는 완도와 진도를 어용 수렵장으로 지정해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녹용철마다 궁중의 전속 수렵인 이 일정량의 사슴을 잡아 진상했다고 한다. 같은 꽃사슴이라 해도 강용(江茸)이라 부르던 강원도 산을 더 평가해주었지만 수용(水茸)이라 불렀던 남해안산도 북용(北茸), 즉 말 사슴의 그것보다는 훨씬 더 평가했었다. 여기까지 사슴에 관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들어오자 나의 본래 쫓던 탐색의 목표는 더욱 뚜렷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앞서 제시했던 가설대로 남해안에 순종 사냥개가 오랜 세월 보존 가능케 했던 이유는 이 지역 일대에서 상업성 있는 사냥이 행해져 왔었고 그 대상은 이 비싼 녹용을 가진 사슴들 때문이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 [물론 반론이 없을 수는 없다. 사슴 사냥이라야 녹용의 채집이 가능한 여름의 한철 빼놓고는 사철 할 수도 없는 한철 장사가 아니겠느냐는 반론이 그 것이다. 그러나 여름에 다 못 잡은 사슴에서 가을이면 비싼 녹혈을 얻을 수가 있고 더 해서 초겨울의 교미철이 되면 녹용만큼이나 비싼 녹편[鹿鞭-사슴의 생식기]을 채집할 수가 있으니 그런 반론은 잘못된 것이다. 사슴 사냥의 기회가 없었다면 멧돼지나 노루 같은 짐승도 잡았을 것이다.. 고가의 공장 장비를 쉬지 않고 가동하는 현대의 경영인들처럼, 그 무렵 사냥꾼들도 고가의 라이카를 일년 사철 부지런히 사냥터로 내몰아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사냥의 주요 표적은 역시 사슴이었을 것으로 확실하게 추정된다..] 그것은 사슴이 가진 경제성과 그 사슴을 잡는 사냥이 가진 생산성 때문이다. 사슴의 뿔, 녹용은 현대인으로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가로 거래되었었다. 녹용이 얼마나 귀한 상품이었는지 한 사례를 들어 보자. 일제시대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었고 독립 운동가이었으며 해방 후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철기 이 범석 장군은 독립운동 사이 사정이 있어 1920년대 북만주에서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직업 포수를 수년간 했었다. 그는 말년에 쓴 우둥불이라는 자서전에서 북만주의 흥안령을 넘어가 외몽골에서 했던 녹용사냥을 회고했었다. 녹용 철이 되면 만주 각지에서 수많은 사냥꾼들이 그곳으로 몰려오는데 수 십일간 수 천리 머나먼 길을 힘들게 걸어 그 곳으로 와서 한 마리만 잡아도 그리 나쁜 장사가 아니었다니 이 간단한 사례에서도 녹용의 가치를 짐작할 만 할 것이다. 녹용이 이와 같이 고가이면서도 사냥의 용이함이 더욱 남해안 일대의 사슴사냥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이 이외에도 돈이 되는 사냥 동물은 더 있다. 여러모로 비싼 범,웅담을 얻을 수 있는 곰, 향내가 뛰어난 사향을 가진 사향노루 등일 것이다. 그러나 그 상품들이 얼마나 비싸건 그것을 얻기 위한 비용 대 효과의 경제학적인 생산성이 있어야 한다. 위의 대상 중에서 그 희소성으로 인하여 조직적인 사냥을 행하기 힘든 사향 노루를 제외하면 나머지 동물들은 포획하기에 힘들고 위험한 맹수들이었다. 즉 수도 많았었고 온순했던 사슴을 잡는 사냥이야말로 가장 생산성 높은 사냥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사슴 사냥에 사냥꾼의 관심과 노력이 집중되었을 것이다. ------------------------------------- 역시 강한 추리일 수밖에 없었던 위의 글을 써 놓고 몇 년 뒤 중국을 방문했다. 방문 목적이 여럿 있었으나 위의 즉, 그곳 직업 포수들의 타겟트 게임, 다시 말하면 최고 사냥 목표 동물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한 것이었다. 앞에서 몇 번 소개한 백두산 포수 최 석도씨를 만나자 말자 물어 본 것이 앞의 질문이었다.. “ 가장 돈벌이 되는 사냥은 뭣이었습니까?” “ 곰 하고 사슴이었오. 지금 두 사냥물의 가격은 같지만 옛날에는 사슴이 더 값을 많이 받았었지. 그래서 항상 사슴을 많이 잡으려고 노력을 했었소.” 그는 사슴은 춘 삼월부터 서리올 때까지 거의 일년내내 잡을 수 있었고 잡을 수 있는 숫자도 많아 아무래도 곰 사냥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었고 일 년 사냥물 수확 처분에서 차지하는 비중[매출액]도 사슴이 제일 컸었다는 회고를 했었다. ------ ------- ----- --- ----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제2부]
교수형에 처했다는 사실은 말이나 소도둑들의 횡포가 얼마나
지독했었는지를 증명해준다고 할 것이다.
어느 진돗개 블로그에서 퍼온 흑구 사진 . 미리 양해 못 구한 주인님께
감사드린다.
13. 순종 보존과 다량 이주.
길렀던 두 마리의 세파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얻은 신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들 개들을 양조장 주인이 알게 모르게 교배를
시켰던 결과 동네 전체에 수십 마리의 잡종 세파트가 퍼졌었다.
없어 지고 단지 약간 흐려진 물이 잉크 방울이 더 해졌다는
것만 말해 줄 뿐일세.
라이카들이 천년의 세월을 살아남아 진돗개들이 되었다는 것은
그 수량적[數量的]인 면에서 신빙성을 둘 수가 없었다.
구 한말 선교사들이 가져온 대 여섯 마리의
조상 개들로부터 퍼져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외국으로부터 긴 세월 동안 많은 세파드가 한국으로 유입되어 와서
한국 정착을 도왔다.
관계에 있다.
야만스러운 짓이다.
늘어난 제주도의 라이카들은 제주도를 진도에 라이카를 배출시킬 공급기지가 되었을 것이다.
말해 준다.
동일 생활권이었다.
참고 해야 할 사항이다.
슬픈 이야기를
나오는 자들이
있는 진도 등의 가까운 전라도 해안에는 대단히 많은 제주도민의
이주자가 살았을 것이다,
잭 런던이라는 사람이다.
있는데, 그러니까 크론다이크 개 보다 조금 더 크고 몸집이
더 있고 힘이 더 세며 털이 더 짧 았다. ’
크론다이크는 얼래스카와 카나다와의 국경부근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되기도 한 곳이다.
같은 개들이었을 것이다.
한반도에 활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떤 흔적을 이 한반도 내에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 전해 내려오는
풍문이나 기록조차도 찾을 길이 없다.
식견[食犬] 문화 탓이라고 했다.
식견 풍습과 거리가 먼 몽골인들의 애견 문화 속에 증식을 거듭해서
제주도를 라이카의 공급기지로 만들었음을 지적한 대목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반도 남단 남해안 일대에서만은 다수의 순종 견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간단히 고립된 도서 지역 탓으로 돌리고 있다.
개들과 피가 섞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순종이
잘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닿듯 가까워 거의 육지라고 할만하다. ( 지금은 다리로 연결 되어있다)
말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경작을 위한 평지도 잘 발달되어 있다.
땅과 물의 물산도 풍부하여 인구도 많아
제주 라이카가 진도에 와서 진돗개의 조상이 된 경로 확인에 한발 더
다가 갈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나를 이 방향으로 인도했는지도 몰랐다.
간접적인 풀이가 될 수있는 이 순종 보존의 이유를 찾아보기로 했다.
보존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결론을 못 얻고
헤어졌었지 ? ”
훨씬 더 유명했었던 거제개도 사냥개란 말 일세 !”
말한 대로 진돗개와 거의 비슷한 아류라면 말야,
이 것들도 사냥개들 이겠지”
데려 왔었던 진도여행 중에 차안에서 어느 노인 분에게 들은 말이었다.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 기이하게도 생각 들었지만 나는 즉석에서
그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했다.
수화기를 놓은 나는 아까의 졸음이 말짱히 가신 머리로 새로 나타난
트게 되었다.
길러 왔던 사람이었다.
직업 포수들이 한 명씩은 꼭 있었거든. ”
그 방면의 추가 정보가 필요했다.
혼란스러웠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불을 켰다. ㄹ
검은 라이카의 새끼들 중에 흰 강아지도 보인다.
다색 유견의 출산 습성이 진돗개와 꼭같다.
앞서 소개한대로 제주개는 이스트 라이카의 특징인 검은색이었고
검은 색이 있는 것이다.
달리 생각할 곳은 없다.
개념이 정립되는 것이다,
18. 상업성과 순종 보존.
직장으로 향했다.
뻗어 나갔다.
흔적을 찾아 볼 작정이었다.
진도로 달려갔다,
보다가 말의 고향 몽골이 자연적으로 생각났고 뒤에 따른 연상은
고사까지 왔다.
지금까지 살아남았겠죠.”
나는 한마디 거들었다.
그는 자기가 한 말이 타당하게 생각되었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왔다는 것이었다.
백 번 맞는 말이었다.
역시 진돗개의 전성기는 일제말기다.
그 때는 일본군들이 추운 만주 주둔 관동군을 대 확장 할 때였던지라
방한복을 만드는데 쓸 짐승 가죽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컸었고 털가죽의 가격도 아주 좋았었다.
주민들은 이 괜찮은 돈 벌 기회를 모른 체 하지 않았었다.
수렵 문화 발생의 이유를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쁜 일정을 보낸 나는 진돗개 조상 찾기에 다시 덤벼들었다.
경영하고 있는 정 사장을 찾아갔다.
소개한 바 있다.
불만을 개를 사랑하는 것으로 삭였었다.
앞세우고 개사냥을 다니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없는 터라 주로 야간에 해야 되는 그의 사냥은 어쩔 수 없는
불법 사냥일 수밖에 없었다.
사냥을 하다가 적발되어서 나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전남 영암의 월출산 일대인 것을 생각하면 일견 타당성 있게 보인다.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압수해 가버렸었다.
바로 해구신 사냥을 개를 가지고 한 것이 틀림없어요. ”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질주시켜 잡는 것 입니다.
주력 좋은 라이카를 갖고 싶었겠죠.”
별다른 기대를하지 않았기에 나도 그가 하는 말을 그저
듣는 것으로 응대하다가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내용 전부가 생소하기만 했다.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집중시켜 책을 읽어나갔다.
일렁거리는 것이 기묘하게만 생각되어 가다가
번쩍 한 구절에 눈이 멎었다.
잡아왔다.’
시도하는 자치 단체까지 있다.)
보면 더욱 더 믿어지지가 않았다.
기록 해놨던 것이다.
들러 진송이를 데려 왔던 출장길에서 그 동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살해 당했는데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이름은 아닌 것이다.
것이었음을 부인치 못 할 것이다..
한 공헌을 하게 되리라고 미처 기대 하지 않았었다.
써진 책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사슴에게 누렁이라는 정겨운 토속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말사슴
이 대형 사슴에 이어 한국에 살았던 사슴이 매화록이라고 불리던
여러 사람에게
비교가 안 될 만큼 월등히 뛰어났다.
다갈색의 바탕에 점점이 박힌 하얀 점들은 문자 그대로 만개한
그는 조금도 주저치 않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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