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 다큐멘타리
역사 추리
-진돗개의 조상을 찾아서.[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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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를 고민하다가 오늘 결단을 내려 몇 부로 나뉜
진돗개 조상 찾기 글을 앞으로 하루에 한 부씩 사흘 동안 올리도록
하겠다.
글의 내용은 내가 지난 20여 년간 추적해온 진돗개의 조상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 인가 하는 것을 세미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역은 것이다.
나는 올림픽이 있었던 무렵 어느 날 홀연 바람에 실려 온 듯한
한 정보를 줍는다.
오래전부터 진돗개의 조상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이 진도 내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왔다고 본다.
진돗개의 조상이 몽골에서 왔다는 것,
네눈박이 진돗개 흑구가 진짜 진돗개라는 것,
여기에 나의 특유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진돗개의 뿌리를 찾아 나선다.
내가 수많은 진돗개 관련자들과 대화를 나누었었고 진돗개 자료 수집을
위해 중국을 한 번, 그리고 제주도와 진도를 각각 두 번을 다녀왔다.
그리고 모으고 다듬고 분석하고 추리하고 판단하고 그 결과를 여기에
내놓는다.
이 글을 올리는 것을 무척 망설여 왔었던 것은,
1.이 글은 20년 전부터 틈틈이 써오며 고치기,덧깁기,
잘라내기 등등으로 여러 번 편집 한 것이다. 그래서 글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많은 것과,
2.글이 블로그에 올리기가 너무 길어서 짧게 만들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3. 20년 전에 내가 처음 발견했다고 흥분해서 기록했었던 일부 사실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 되어버려 주저 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을 무릅쓰고 지금 여기 소개하는 것은
야후 블로그에 올릴 기회를 살리지 않으면 그간 애를 쓰고 수집한
이 정보가 사장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들어서였다.
읽어 보시면 극히 당연한 소리를 내가 무슨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 같은 대목을 발견 할 것이다.
지금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라이카라는 개를 소개하는
대목이 그럴 것이다.
내가 이 개를 주목하기 시작 한 것이 80년대 말이었고
라이카라는 개는 어지간한 전문 애견가들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라이카가 진돗개의 조상이라는 사실도 알만한 애견가들
사이에 상식이 되어있고 북방의 환상적인 개 라이카가
흔하디흔한 개가 된 현실이니 이 대목을 20년 전의 눈으로
보아주시기를 삼가 부탁드린다.
글은 한 때 방송국과 다큐멘타리 프로 구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어서 세미 다큐멘타리로 구성했다.
결과 생각지 않게 길어졌다.
이점 양해 부탁드린다.
그리고 이 글을 엮어 가면서 전의 호랑이나 늑대의 글과 같이
이상오씨의 한국 야생 동물기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것을
미리 알려 드린다.
내가 비록 긴 시간과 경비를 들여 진돗개의 조상을 찾았다 해도
말 못하는 짐승이 대상이라서 얼마든지 내가 빠뜨렸거나
내가 본 시각과 다른 시각도 있을 수가 있다.
얼마든지 다른 시각과 관점을 환영하겠다.
지난 ·울프 독의 늑대에 관한 글에 너무도 좋은 답글들
주신 것처럼 이글에도 좋은 답글들을 기대해본다.
단 맹목적인 국수주의나 향토 의식으로 근거없이 생떼를 쓰는
식의 자기 주장은 삼가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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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다른 역사 찾기.
과연 역사란 문자를 가진 인간들만의 독점물일까?
그러나 분명 그렇지만은 않다.
세상에 예외란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엄연한 진리를 생각해보자.
말도 못하고 문자도 없는 동물이 인간들과 같이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예외적인 사실이 여기에 존재한다.
이제부터 풀어갈 이야기, 다시 말하면 내가
국견 진돗개의 뿌리를 찾아서 고생과 보람으로
보낸 이십년 가까운 기록은 그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리라고 믿는다.
이야기의 시작에 앞서 인사드린다.
나는 강원도의 모 국립 공원에 근무하는 서 재철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직장인이다.
동물에 관심이 많아 틈이 나면 여러 동물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취미로 가진 흔치 않은 아마추어 동물 연구가이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라이카라는 개가 있다.
이 개는 지금 지금 국내에도 들어와 있고 아는 사람도 많아졌으나
내가이 진돗개 조상 찾기에 나선 20여 년 전에는 한국인에게 전혀
생소한 견종이었다.
대륙의 개인 라이카의 생김생김을 보면 대체로 진돗개나
아키다 견같이 삼각형의 귀가 바짝 서고 꼬리가 서거나 말린
북방 견 타입으로서 보기에도 큰 체구와 힘찬 몸놀림에서
야성과 용맹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 개는 적어도 서식지의 넓이로만 기준을 삼는다면 아시아의
대표 견이라는 타이틀을 받을 자격이 있는 개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파도 높은 태평양 연안에서 눈보라치는
시베리아 광야를 가로 지르고 유라시아의 경계선인 우랄산맥을
넘어 숲과 호수의 나라 핀랜드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서식하는
이 라이카는 따라서 변종도 그만큼 다양하다.
크게 나누면 시베리아의 동쪽에 서식하는 이스트 라이카와
서쪽에 서식하는 웨스트 라이카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이중 이스트 라이카는 더 크고 검거나 회색으로서 색깔 구성의
변화가 다소 있지만 상당수의 개가 눈 위에 마치 또 다른 눈이
있는 것처럼 누런 점이 있는 불랙 앤드 탄 [세파드처럼 상반신은
검고 하반신은 누런 개] 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 라이카들은 인간들이 만든 이데오르기 대결이라는
쓸데없는 불장난 때문에 지난 오랜 세월의 현대사에서
남쪽의 우리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왔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 정일이도 길렀던 만큼 한민족과
라이카와 인연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쯤에서 풀어가고자 하는 이야기의 결론을 미리 밝힌다.
라이카, 그중 이스트 라이카는 한국의 국견이라 부르는
진돗개의 조상이며 이들 두 개들 사이에 지금까지 아무도
추적해보지 않은 비밀의 역사가 존재한다.
길지 않았던 내 인생의 많은 세월에 걸쳐 이 사실의 발견에
이르게 만든 곡절 많았던 사연을 지금부터 소개해
나가기로 한다.
2. 괴물 개
나는 라이카의 존재를 지금으로부터 한참 전인 70 년대에
알게 되었었다.
그 무렵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독재 하에서 모든 국민이
숨을 죽이고 전전긍긍하던 사회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중학교 생활을 하던 나는 어느 겨울 방학 때 원주의
작은 아버지 댁에 놀러 갔다가 그 분으로부터 한 책을
빌려 보게 되었다.
1950년대 말에 출판된 그 책의 이름은 한국 야생 동물기였다.
이 책을 들쳐본 나는 몇 장 읽어보지도 않고 그 내용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사냥을 밥 먹듯이 좋아했던 작은 아버지가 사냥을 시작했을
젊은 시절 사서 읽었을 그 책은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야생 동물학의 바이블이라 할만했다.
평소 동물의 세계에 관심이 많아서 그 무렵 인기리에 방영되던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를 밥 먹는 것보다 더 즐겨보던 나에게
이 책은 문자 그대로 황홀한 충격 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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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오씨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진짜 한국 늑대의 정체”라는
글을 보아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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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꺼운 책은 우리나라 토종개에 관해 비할 바 없이 중요한
기록들을 품고 있다.
그 기록의 하나, 이런 글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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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 개의 사냥 능력과 그 기백이 강한
실례를 하나 소개하겠다.
중일전쟁의 말기에 일본군의 정예인 관동군이 남방으로 전출하고
그 유수 사령부가
경북 경산군 고산면의 한 국민 학교에 주둔하였음을 종전 때까지
일반은 알지를 못했었다.
종전이 되자 숱한 군마와 트럭 등을 버리고 군대는 철퇴하였다.
그 가운데에 사령관인 육군 소장이 북만 에서 시베리아견
한 마리를 데리고 와 있다가 버리고 간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베리아 개는 가까이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어는 한국 사람의 소유로 되었다.
그 개의 외모는 우리나라 재래종과 같으나 빛깔이 검고
큰 대형견이었다.
평소에는 아주 유순하여 이웃집 개들과 싸움을 잘 하지
않으며 낯선 사람이 출입하여도 경솔히 짖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조그마한 행동에도 위엄과 강한 기백을 간직하고 있음을
축견에 대한 지식이 없는 그 주인은 헤아리지 못 하였을 것이다.
하루는 주인이 뜰에서 과수원에서 사용하는 구루마[수레]의
말에게 죽을 먹이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 개는 호기심에서인지 가까이 가서 그 죽을
함께 먹으려고 했다.
그리하여 말과 개는 장난하는 듯이 서로 짖으며 뛰고 달려들고
달아나고 하였다.
이 광경을 본 그 주인은 개에게 ‘물어라 ! 물어라!’ 고 소리를
지르면서 장난을 조장 하였다.
이렇듯 4,5분 동안 장난을 하다가 말이 갑자기 성이 났는지
뒷발질을 하여 개의 머리를 차 버렸다.
개가 날쌘 동작으로 몸을 돌렸으므로 정면으로 차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두 어 번 딩굴어 땅에 넘어졌다.
벌떡 일어선 그 시베리아 개의 눈초리는 야수에서만
볼 수 있는 살기충천한 것으로 변하였으나 그 주인은
이 태도의 변화도 모르고 여전히 ‘물어라! 물어라 !’고
부추기었다.
개는 말의 목을 목표로 공격하였다.
개의 이 모진 공격에 드디어 말은 견디다 못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점점 싸움이 고조되어 말의 도주도 필사적이며
개의 추격도 급하였다.
정신없이 달아나는 말은 귀중한 사과나무 가지를 분지르고
비명을 올리며 뺑뺑 돌고 있었다.
그제야 당황해진 그 주인은 제지하려고 고함을 지르면서
개를 때리려고 하였으나 개의 눈초리가 평소와 판이하여
불빛이 쭐쭐 흐르는 것 같음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나서 뒷걸음쳤다.
온 식구와 함께 방안에 뛰어 들어 가서 방문을 닫고 창문으로
고함만 지를 따름이었다.
약 한 시간동안 필사의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며 사과나무들은
거의 못쓰게 되었고 말의 비명소리는 멀리 있는 동리 사람들도
놀랄 만큼 높았다.
마침내 말의 비명소리도 달리는 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으므로
주인은 겁이 나면서도 가만히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말은 쓰러졌으며 개는 말의 목을 물고 있었다.
약 30분이 지나서 말이 절명하자 개는 혀를 길게
빼물고 일어섰다.
주인의 방문 앞에 와서는 피곤한 듯이 누워서 다리와
옆구리를 핥고 있는 것이었다.
주인의 눈에는 그것이 축견이 아니라 맹수와 같이 보였으며
겁이 났으나 낮은 목소리로 한 번 불러 보았다.
개는 평소와 다름없이 꼬리를 치며 칭찬을 바라는 듯하였다.
10여일 후에 필자는 이 소문을 듣고 그 개는 틀림없는
시베리아 개임을 알고 즉시 그 개를 매수 하려고 했으나
아깝게도 2,3일전에 축견에 대해서 상식이 부족하였던
그 주인은 도리어 그 성능과 기백에 겁이 나서 그만 잡아먹어
버렸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필자는 그 귀중한 시베리아 개의 혈통을
얻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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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도 공감하시듯 비명에 죽은 말에 대한 동정심을 잠깐
접어두고 본다면 들개나 이리 같은 야수가 아닌 축견이 단독으로
말을 공격해서 죽였다는 사실도 좀체 믿기 힘든 사실이고, 따라서
그렇게 사나운 개가 있다고 상상해 보기도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 뒤로 시베리아 개라는 이 미스테리의 개는 항상 내 관심의
대상이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문헌을 뒤지고 내노라는 전문가들에게 문의를
해봤으나 시베리아 개의 정체를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이러구러 하면서 세월은 흘러 나는 학교를 마치고 사회인이 되었고
곧 이어 바쁜 직장 생활에 한참을 쫓기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와 같은 아마추어 동물 연구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만나보게 되었다.
강릉에서 중학교 생물을 가르치는 박 선생과 나와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맺어졌다,
그 무렵에도 이미 나이가 육십대였던 그분은 첫 만남에서부터
도대체 그 넓이를 알 수 없는 동물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나를
압도했었고 몇 번 만나지 않아 나는 스스로 그를 동물 연구의
대 스승으로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시 세월이 흘러 박 선생님은 지금 자식들을 다 가르치고
결혼시켜 독립시킨 홀가분한 처지로 동해가 바라보이는 설악산
자락에서 가축들을 기르며 유유자적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 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였던가 ?
나는 위의 괴물 같은 개를 아는지 물어 봤다.
박 선생은 물론 한국 야생 동물 기라는 책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내가 10여 년을 두고 알고 싶어 하던 시베리아 개라 불리우는
그 맹수의 존재를 박 선생은 허망하리만큼 간단히 밝혔다.
“ 아---! 그 놈 말야 ? 일본 책에는 가끔 소개되어 나오지.
현지에서는 라이카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어.
대단한 놈이야! 시베리아 호랑이를 사냥하는 용맹무쌍한 개야!”
“ 라이카라고요? 그 이름은 1955년도이던가? 소련이 쏜 두 번째
인공위성에 실려서 우주로 보내진 개 이름이 아닙니까? ”
“ 생김생김이 다르더군. 그 개와 이 개와는 이름만 같을 뿐이지 같은
종류는 아니야. 그 때 우주로 날려 보낸 라이카는 사모예드와
테리어의 잡종개였다지?---길거리에서 주워온 개였고--”
나는 이렇게 해서 라이카라고 하는 맹견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우연히도 그 이름은 소련의 우주견과 같을 뿐 아니라 독일의
명품 카메라 이름과도 꼭 같아서 머리 속에 깊숙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라이카를 더욱 미스테리의 존재로 만든 것은 박 선생이
지나가는 것처럼 던진 한마디 말이었다.
“ 그 개가 진돗개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긴 있는데-----.”
“ 네? 시베리아와 진도가 몇 만리인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 그런 신문 기사가 국내 신문에 실린 것을 오래 전에 읽은 일이 있지.”
그러나 박 선생은 그 기사의 신빙성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 라이카 실물이 없으니 확인 해볼 방법도 없지만 그 사실의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니야. 러시아가 어딘데 그 것이 진돗개의
조상 이 되겠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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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은 통키라는 아이 디 쓰시는 독자분이 고맙게 주신
답글이다.
옛 고전『박물지 (博物志)』에는, '한국에는 까만 개가 있는데 이름을 '로라 한다(韓國有無犬名盧) ." 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로(韓盧)는 한(韓)의 로(盧)로서, 한국(韓國)의 명견(名犬)을 가리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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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로(韓盧)는 서기 이전부터 존재했었던 것으로 사료 되며 박물지에 고구려에 관한 기록이 많고,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에 호랑이를 사냥하는 검정개가 그려져 있는데 이 개가 바로 한로(韓盧) 입니다.
수렵도에서 호랑이를 쫓아 말과 같이 힘차게 달리는 검정개가 한로, 또는 라이카로
보인다.
윗 사진이나 통키님이 주신 답글로 보면 라이카는 앞에 몽골이니
러시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지 말고 "고구려 개"라고 하는 것이
타당 할 것 같다.
3. 네눈백이 흑구 진송이
그러고 나서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88 올림픽으로 전국이 들썩거릴 때 나는 공무로 다도 해상
국립 공원에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다.
생각보다 업무가 일찍 끝나서 서둘러 귀로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같이 간 동료가 한사코 졸라댔다.
돌아 갈 날이 이틀이나 남았으니 진도의 자기 삼촌 집에
잠깐 들렸다 가자는 말이었다.
진도에는 자기의 삼촌이 양식장을 하고 있으니 하룻밤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국 그에게 지고 말았다.
사실 그간 가져 왔던 진돗개에 대한 관심이 나를 그 곳으로
끌었는지도 몰랐다.
찾아간 진도의 작은 어촌에 사시는 동료의 삼촌은 우리를
성대한 저녁상으로 극진히 대접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나는 새벽 산보 삼아 신발을 꿰신고
집 밖으로 나섰다.
엷은 안개가 깔린 바닷가를 거닐다가 돌아오던 길에
집 대문 밖에서 양식장으로 아침 일을 나서는 삼촌과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내 귀에 어린 강아지들의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방 마루 밑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집에서 개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은 어젯밤 개 짖는 소리로
알고 있었다.
그 개는 새끼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미 개였던 것이다 .
“ 새끼가 있군요 ?”
주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 바빠서 본 척도 못했는데 어미가 잘 키우고 있나 봅니다.”
내가 계속 관심을 갖는 눈치를 알아챈 주인은 말을 계속했다.
“한 때는 부업 삼아 혈통 좋은 암놈을 네 마리나 가지고
있었던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일손이 딸려서 다 처분하고 한 마리만 기르고 있습니다.
저놈들 수발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도에 온 김에 보육 조합에 들려 진돗개 순종 한 마리를 사갈려고
하던 차였다.
“ 강아지 구경을 한 번 해도 될까요?”
“ 그럼요! ”
주인은 마루 밑으로 가서 개들을 불렀다.
어미개가 먼저 꼬리를 흔들며 기어 나오고 뒤이어 앙증맞은
강아지들이 뒤뚱거리며 달려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인은 분명 강아지가 두 마리라고 했는데 어미 개를 따라 나온
강아지는 세 마리였다.
더 기이한 것은 강아지 두 마리와 어미 개는 하얀 색깔인데
한 마리만은 검정 색깔이었다.
소위 아마추어 동물 연구가라는 나도 그때까지 검정 진돗개를
본 일이 없었다.
“ 검둥이는 업동이인 모양이지요? 불쌍하군요.”
나는 흰 어미개가 어미 잃은 검둥이 강아지를 길러준 것으로만
생각하고 어처구니없는 덕담을 했다.
주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웬걸요. 저 검둥이도 흰 어미개가 낳은 자식입니다."
" 네에?“
“ 맞습니다. 진돗개들은 흰 부모 개 사이에서 누렁이도 나오고
검둥이도 나오지요.재작년에는 저놈이 한 배에 누렁이 흰둥이
검둥이 의 세 색깔의 강아지 삼 형제들을 낳아서 동네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어요.”
듣기를 처음 듣는 소리였다.
진도에서는 상식일수도 있는 이야기를 나는 새삼 흥미를 갖고
열심히 들었다.
“ 그렇다면 강아지가 세 마리일텐데 왜 두 마리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아까 주인이 한말이 되살아나 그 연유를 물었다.
“ 아 그거요? 이유가 있지요. 족보에는 흰 백구와 누렁 황구밖에
올리지 못합니다. 같은 배에서 나왔어도 검정 흑구는 잡견 취급밖에
못 받습니다. 제값도 못 받으니 진돗개로 아예 여기지를 않습니다.”
“ 참 이상하군요, 뭐가 잘못 된 것 같습니다.”
나의 말에 주인은 공감을 표했다.
“ 나도 같은 생각이지만 촌 농부가 어쩔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제도가 그렇다니 따를 수밖에요 .”
후에 알게 되었지만 흑구의 비극은 1967년도 광주에서 있었던
진돗개 표준 체형 확정회의 에서 김 모라는 수의사가 진돗개를
세계의 공인 견으로 만들려면 색깔을 단순화 시켜서
황색과 흰색 두 가지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데서부터 비롯되었었다.
이 주장이 받아 들여져 결정됨으로서 흑구는 표준 체형의 기본이
색깔에서부터 실격 당해 족보에도 못 오르는 비참한 잡견의
처지로 전락 되었다한다.
당시 그런 사실을 알 바 없었던 나는 진돗개에 대한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강아지들이 재롱을 떠는 장면을 지켜봤다.
주인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어서일까?
나의 눈길은 자꾸 가엾은 흑구에게로만 주어졌다.
다른 흰 형제 두 놈이 어미 개 언저리에서만 숨고 수줍음을
떠는데 이 흑구는 앞으로 과감히 달려 나와서 나의
운동화 코를 핥았다.
나는 그 귀여운 모습에 절로 흑구를 들어 올려 뽀뽀를 했다.
나의 손안에서도 주먹 크기의 흑구는 아기 손 가락만한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재롱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얼굴 위에서 반짝거리는 검은 눈동자와 그 눈들 위에 마치
또 다른 눈동자처럼 박힌 누런 점들은 이 아기 검둥이를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게 보이게 했다.
나는 외부 자극에 엄마나 형제의 그늘을 벗어 나와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강아지가 좋은 기질을 가진 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강아지 흑구가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놈은 마치 친부모라도 만난 듯이 나에게 달려들어
안기며 예쁜 짓을 하지 않는가!
나는 색깔이 어쩌구저쩌구 하며 같은 어미 뱃속에서 나온 강아지를
형편없는 폐품 처리로 희생시키는 인간들의 행실머리에 비애감
같은 것을 느끼며 불쑥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 아저씨! 이 검둥이를 저에게 넘겨주시지요. 물론 가격은 다른
강아지와 꼭같이 쳐서 드리겠습니다.”
주인은 놀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아니 이놈은 족보에도 올릴 수 없는 개인데요. 이왕이면
흰 놈으로 가져가시지요.”
나는 강한 어조로 거절했다.
“ 이렇게 품속을 파고드는 놈을 어찌 모른 체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이놈을 다시 팔거나 어느 대회에 출전시킬 생각도
없으니 족보 같은 것은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은 나의 고집을 알아보고 더 이상 권유를 하지 않았다.
되려 입장을 바꿔 흑구를 두둔하는 소리를 했다.
“ 하긴 옛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흑구가 기질이 제일 강하고
사납다고 합니다. ”
“ 네?”
“ 지금도 일부러 흑구만 사다가 기르는 노인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말씀에 의하면 흑구가 진짜 진돗개 원종이랍니다.”
“ 원종 ?”
나의 머릿속에 섬광같이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라이카가 진돗개의 조상일지 모른다던 박 선생의 말이었다.
섬광은 또 다른 섬광을 연쇄 폭발처럼 끌고 왔다.
한국 야생 동물기에 써 있는 시베리아 개, 다시 말하면 라이카의
색깔이 검거나 잿빛이라는 구절이었다.
“ 혹시 잿빛 진돗개도 있습니까?”
나는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주인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 있지요. 재구라고 부르는 개가 있습니다.”
흑구가 진돗개의 원종이라는 소문.
라이카의 검정과 잿빛 색깔이 진돗개에서 발견된다는 사실,
안개와 같이 막연하기만 하던 라이카가 진돗개의 조상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희미한 단서가 최초로 떠올랐다.
나는 부쩍 이 문제를 파보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랐다.
더 질문을 계속하려는 찰라 늦게 일어난 동료가 방문을 열고
큰소리로 외쳤다.
“ 숙모. 아침을 빨리 주셔야겠어요. 이러다간 오늘 밤 안으로
집에 도착할 것 같지 않네요.”
보니 어느새 새벽안개는 거의 걷히고 붉은 해가 수평선을 박차며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밤 안으로 강원도 북쪽 끝에
있는 집에 도착할 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들고 읍에서 불러온 택시를 탔다.
물론 나는 주인 아주머니가 헌 프라스틱 바구니에 싸준 흑구를
잊지 않았다.
굳이 받지 않겠다는 주인에게 흑구의 값도 두둑이 치렀다.
한국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먼 길을 달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밤중이었다.
아내는 나와 동행한 검은 진돗개를 휘둥그래진 눈으로 맞았다.
그 긴 시간 여행을 흑구는 낑낑대는 소리 한마디 없이
잘도 버티어 내서 나의 사랑을 더욱 두텁게 했다.
다음날 저녁 상머리에서 아내와 흑구의 이름을 짓는 회의를 가졌다.
아내의 제안대로 진송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진송이는 식구들의 애정 어린 보살핌 속에 씩씩하게 자랐다.
항상 활발한 모습으로 동네를 휩쓸고 다니는 것을 보면 흑구가
언제 검다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았더냐는듯 싶었다.
오히려 흔치 않은 검정 색깔과 눈 위의 누런 점 때문에 네눈이라
불리며 동네 여러 사람들의 관심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귀가 아직도 완전히 서지도 않은 생후 육 개월 될 때부터
벌써 쥐를 잡기 시작하며 타고난 수렵 성을 발휘했다
진송이의 수렵성은 일취월장하면서 밤마다 뒷산 나들이를 하던
그놈 나이 한 살 무렵에는 너구리 정도는 이미 졸업하고 노루까지도
넘보는 일류 사냥개가 되어 있었다.
자연보호를 직업으로 하는 나의 처지 때문에 그 짓을 말려 댔지만
진돗개의 야성 본능을 이기지 못하는 진송이는 틈만 나면
뒷산 출입을 했다.
진돗개 흑구
- 다른 블로그에서 허락없이 퍼온 것인데 주인장님께
감사드린다.
4 몽골에서 온 진돗개 조상.
나는 진송이가 커 가는 동안 이것저것 진돗개에 관한 자료를
찾아 모으면서 뜬구름같이 희미하게만 느껴지는 라이카와
진돗개 사이를 잇는 연결 고리 찾기라는 화두를
풀어 보려고 했다.
그간 열심히 모았지만 아직도 빈약한 수준의 자료에서도
몇 가지 정보가 발견되었다.
진돗개의 조상이 고려 때 몽골군이 데려온 몽골 개라는 사실이었다.
그 정보는 많지 않은 진돗개 관련 책자나 신문기사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알고 본즉 진돗개 애견가들이나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 사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상식화된 것이었다.
“ ? ”
나는 그 정보 자체의 신뢰성을 따져보기에 앞서 그 정보가
보존된 연유에 강한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몽골 족이 한국역사에서 사라진지가 언제인데 이런 사실이
소멸되지 않고 전해져 온 것일까?”
진돗개에 관련된 자료 수집에 애를 먹어온 나는 진돗개에 대한
이 정보가 반 천년의 시공을 거쳐서 보존되어 전해 내려온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역사의 사실이란 기록에 의해서 후세에 전달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역사의 기록을 담당한 지식인들에게 진돗개는
물론이고 여하한 종류의 개라 하더라도 기록의 대상은커녕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었다.
불 속에서 자기 주인을 구한 오수개의 일화 등 몇 안 되는 개의
역사 기록들은 개에 관한 기록이라기보다 개와 관련된 인간들의
기록들이었다.
진돗개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기록은 진도까지 가서 진돗개의
존재를 확인하고 조선 총독부에 천연 기념물 지정을 건의했던
총독부 시학관 모리[森 爲三]의 기록이 최초였다.
1937년도의 일이었으니 자연 과학을 존중하는 근세가 되고서도
반세기 정도가 지난일이 었으니 한국민의 개에 관한 관심의 정도를
알만하다.
“ 그런 기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몽골개 조상의 정보가 소멸되지
않고 전해 왔단 말이지...... ”
나는 이 풀기 어려워 보이는 궁금증을 일단 마음속에 접어 둔 뒤
진송이를 나에게 넘겨준 동료의 삼촌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오랜만에 전화를 받은 그는 무척 반가운 목소리로 나와 진송이의
그간 안부를 물었다.
인사가 끝나고 나는 직접 용건을 꺼냈다.
“ 진돗개의 조상이 몽골에서 온 개라는 말이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 몽골개요------- ?”
“ 고려 때 침공한 몽골 군이 데려온 개가 진도에 정착해서 진돗개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 아--! 그 말요? 알고 있지요! 옛날부터 진도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랍디다. “
“ 진도에 잘 알려진 상식인가요?”
“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어요.”
나는 책이나 기사 등의 각종 기록에 있는 몽골개 조상 설이 현지에
전해 내려오는 정보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 있었고 이 정보 보존은
어느 기록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구전(口傳)이라는 연약한
수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 언젠가는 구전 될 수 있었던 연유를 알아 보아야겠구나 ---”
적어도 동물에 관계된 것이라면 그렇게 광범위하게, 그리고 그렇게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풍문성 정보는 결코 미신이나 속담처럼
허튼 소리가 아니라 진실을 담은 근거가 확실한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서 몽골군을 따라온 몽골개가 진돗개의 조상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돗개의 조상이 라이카라는 가설과 진돗개의 조상이 몽골 개라는
현지 정보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니 전혀 연관이 없는 상반된 소리일까 ?
연관이 없다면 한 사실은 틀린 말일 것이다.
나에게 광대한 남쪽 초원의 나라 몽골과 북쪽 동토의 시베리아
밀림을 누비는 라이카와의 사이에 어떤 연관 사실도 상상되지 않았다.
나는 한쪽 말이 틀리게 나타난 진돗개 추적의 막다른 골목에서 갈 길이
어느 길일지 크게 혼란스러웠다.
5. 몽골개와 라이카 견
그러나 그 뒤 직장 일도 바빴고 자료 수집에도 진전이 없어 진돗개 조상을 밝히는 일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단지 원숙미가 더 해 가는 진송이가 내가 일부러 진도에 부탁해서
가져온 흑구 암놈 진희를 만나서 부부가 된 것이 새 소식일 뿐이었다.
덕분에 우리 집은 진송이의 새끼까지 합쳐서 네눈박이 검은 흑구
가 대 여섯 마리나 소란스럽게 자라는 흑구 집안이 되었다,
세월도 많이 흘러 90년대 초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늦게 퇴근해서 한창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텔레비젼에서는 남북의 창이던가 통일 전망대던가 뭔가 하는 북한 전문
프로가 방영 되고 있었다,
격한 평안도 사투리의 북한 어나운서가 평양의 모 동물원을 배경으로
뭔가를 떠들고 있었다
화면에 나오는 동물들의 모습에 나는 저절로 수저를 놓고 텔레비전을
지켜봤다.
화면에 보이는 동물들은 동물원에 어울릴 수 없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었다,
북한 어나운서는 그 개들이 지도자 동지가 기르시다가 감격스럽게도
동물원에 하사하신 것들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북한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개를 한 마리
한 마리를 비추는 화면을 응시했다.
갑자기 화면에 처음 보는 검은 개가 나타났다.
거의 동시에 그 개를 소개하는 설명이 뒤따랐다.
“라이카견 입니다.”
나는 피가 멈춰서는 것 같았다.
피곤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그 개는 단 몇 초간의
모습이었지만 진송이와 너무도 닮은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색깔의 구성이 비슷했다.
세파트와 같이 위는 검고 아래는 누렁색인 블랙 앤드 탄이라는
색깔이 그 것이다.
더해서 눈 위에 박힌 누런 점 두개는 진송이 가족의 누런 점과
오갈 데 없는 닮은꼴이었다.
얼핏 보았지만 김정일이 길렀다는 라이카는 물론 진송이와
다른 면도 있었다.
북방의 개답게 체구가 우람하게 컸고 주둥이도 길고 귀도 컸다.
그러나 눈 위의 누런 점 두 개,
그 것들은 웅변으로 진돗개와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네 눈을 가진 개가 진돗개 흑구나 라이카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알기 만해도 독일의 롯드바일러도 있고 일본의 가히 견도 있고
마라뮤트 견도 있다..
그러나 그런 네눈박이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진돗개와 그 조상 설이 있는 라이카 두 개들이 공유한
그 흔치 않는 특수성은 움직일 수없이 진돗개와 라이카와의
연결 고리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했다.
나를 놀라게 했던 말을 죽일 만큼의 괴력을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의 개가 거의 이십 년 만에 진돗개와 유사성을 가지고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화면은 몇 초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 뒤 몇 분 동안이나 수저를 들지 못하고 멍청이 앉아
있기만 해서 아내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러시아 흑구 네눈백이 라이카
몇 주 뒤 나는 서울의 친척 동생을 시켜 방송국으로부터 그 프로의
녹화 테잎을 구입했다,
테잎이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박 선생에게 달려갔다.
서둘러 테잎을 본 박 선생은 나 이상으로 경탄을 했다.
“ 역시 라이카가 진돗개와 연관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없는
사실인 것 같군. 옛날 지나가는 것처럼 읽었던 기사 한 줄에
이런 비밀이 담겨 있을 줄이야!”
감개무량한 표정을 한참이나 짓던 박 선생은 나를 격려했다.
“ 이제는 몽골에 사는 개들과 라이카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연유로 라이카가 진도까지 흘러와서 진돗개의
조상이 되었는지,이것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겠군!
열심히 파고 들어 보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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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위의 경험을 한 것이 15년 전의 일이다.
라이카가 한국에 수두룩해진 오늘날 위의 글이 생소하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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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와 진돗개의 관계를 능히 확신 해볼만한 단계까지는 왔지만
라이카-->몽골개--->진도개 조상, 이 삼각 고리를 풀 단서는
아직도 요원했다.
궁여지책이랄까?
나는 이런 추리까지도 해봤다.
정복왕 징기스칸이 말발굽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휩쓸며
유린해버린 국가들 중에 러시아가 있었다.
러시아의 라이카는 이들 몽골 부대의 원정 루트를 타고 극동인
고려까지 와서 몽골개의 명칭을 얻지 않았을까?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것은 한 낱 공상이라는 답밖에
얻은 것이 없었다.
그때 러시아는 지금처럼 유라시아에 걸친 거대 국가가 아니었다.
우랄 산맥을 뒤로 한 유럽의 변방 시골 국가에 지나지 않았었다.
시베리아라는 명칭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지금의
시베리아에는 러시아 백인은 한 명도 없었다.
러시아인들이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개라고 불리 우는
라이카가 사는 극동으로 몰려가기 시작 한 것은 그 뒤
수 백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추리는 불가능 한 것이었다.
나의 답답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송이 가족은 기운차게
자라며 왕성하게 식구를 늘려갔다.
암수 흑구끼리 결합시켜도 흑구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백구나 황구도 나왔다.
나는 흑구가 아닌 개들은 다른 곳에 선물하거나 처분하고
흑구만 남겨서 길렀다.
식구가 늘어 나다보니 근친 교배가 걱정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 순수한 흑구 혈통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교배도 서슴치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 짓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간 진도나 서울 등의 진돗개 애견가들과 닦아놓은 안면을
통해 흑구를 교환하거나 구입해서 피가 섞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세상도 조금씩 변해갔다.
나처럼 억울한 흑구의 처지를 동정해서일까?
아니면 희귀한 것을 찾는 인간 본성 때문일까?
흑구는 물론이고 재구나 호구까지도 찾는 애견가들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서러움을 겪던 흑구의 처지가 대단히 향상되었다,
괜찮은 혈통의 황구나 백구가 삼사십 만원 수준인데도
칠팔십 만원을 주고라도 호랑이 무늬의 호구를 사겠다고
찾아다니는 애견가도 있었다.
더구나 흑구를 서자 취급하던 진돗개의 기준도 많이 완화 되어
흑구도 이제는 정당한 적자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흑구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흑구 전문 사육가로 조금은
소문이 난 나에게 흑구를 사러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덕분에 늘어나는 흑구 가족은 박봉의 내 살림살이에 괜찮은
부수 입원이 되었다.
6. 롬보 참사관
이렇게 진송이 식구들과 살아가던 어느 가을이었다.
진돗개의 조상을 밝히는 결정적 고리를 푸는 우연한 계기가 왔다.
그 가을 나의 직장인 국립공원의 온산에서는 불타는 듯한
단풍이 한창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단풍 구경을 온 인파는 넘실거리는 바다를 방불케 했다,
바쁜 휴일 하루가 저물 무렵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공원 등산로
입구로 순찰을 나간 직원 한명이 비싸 보이는 일제 비디오 카메라 하
나를 주워 들고 돌아 왔다.
우리는 하루 정도만 지나면 주인이 찾으러 올 줄 알았었다.
그러나 사흘 동안이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마침 오후에 서울 본부로 출장을 가게 된 나는 급히
잔무 처리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에게 서울로부터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미국 기업의 한국 지사 직원이라고 자신의 신원을 밝힌 그 사람은
자신의 미국인 상사가 이곳에 단풍 관광을 왔다가 비디오 카메라를
잃어 버렸는데 혹시 그것을 발견했는지를 물어 왔다.
나는 다행이다 싶어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갈 테니 나의 서울 도착지인
상봉 터미날에 나와서 그 것을 인수해 가라고 말해줬다.
그러나 휴일도 아닌 그 날 이상하게도 영동 고속도로는
엄청나게 막혔다.
예정 시간보다 거의 두 시간이나 지나 도착한 터미날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 공단 본부에 들려 출장 업무를 끝낸 나는 미안함을 느끼며
안산 공단에 있는 그 미국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생각 밖으로 그 회사는 모 기업의 창사 기념일로 휴일이었다.
특근을 하러 나온 직원은 자신이 너무 바쁜 업무로
비디오 카메라를 인수하러 나올 수가 없다고 정중히 사과했다.
하루를 더 머물러 출장 업무를 봐야 하는 나는 오후에 할 일이 없었다.
“ 그렇다면 제가 그 곳까지 가서 이것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
나의 호의에 그는 놀랜 어조로 대답했다.
“ 그렇게 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재차 호의 제공을 받아주기를 요청하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제안했다.
“ 정 그러시다면 이곳 먼 곳까지 오시지 마시고 그것을 서울에
살고 있는 당사자에게 전해 주시지요.”
그의 말대로 나는 용산구 동부 이촌동에 있는 외국인 전용
아파트를 찾아 가서 주인에게 비디오 카메라를 전해주었다.
[이 자리에는 지금 지 에스 자이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몇 번씩이나 고마워하는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오는 길에
나는 앞에서 걸어오는 십여명의 인간들 무리와 만났다,
그들의 생김생김으로 보면 어김없는 한국인들이었다.
그러나 옷차림이 보통 한국인들과 조금 달라 보였고 나아가서
쓰는 언어가 생소하기 �이 없었다.
응당 중국어나 일본어야 할 그들의 언어는 전혀 들어 본 바 없는
빠르고 거센 괴상한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든 나는 마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경비원에게
그들의 정체를 물었다,
경비원은 가볍게 대답했다.
“ 몽골 사람들입니다. 몽골 대사관이 이곳에 있거든요.”
나는 깜짝 놀랐다.
대단한 충격이 머리를 스쳤다.
미스테리의 몽골 개만 생각하면 지끈 지끈 해지는 머리속을
덩달아서 휘 집고 다니던 몽골!
달나라만큼이나 멀게 생각되는 아득한 거리감의 나라---- 몽골 !
그것이 어느새 한국과 수교를 하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니!
나는 강원도 산골에 묻혀 세상사에 무심하게만 살아온 탓에
어쩔 수없이 무지해진 나의 현실 감각을 창피하게
느낄 사이도 없이 그들 몽골인들을 따라갔다.
그 들은 단지 안을 걸어 들어가 어느 아파트로 들어갔다.
몽골 대사관은 단지 내 조촐한 한 아파트에 세 들어 있었다.
나는 붐비는 대사관저 밖에서 한참을 빈둥대다가 그들이
문 닫을 시간이 다되어 조용해진 안으로 들어갔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중년의 대사관 직원이 맞았다.
“ 웬일로 오셨습니까 ?”
너무도 완벽한 한국어 억양의 질문에 나는 갑자기 당황해서 할 말을
잊었다,
더해서 이렇게 한국어를 잘하는 몽골 분에게 외국 공관에 찾아와서
대뜸 개 이야기부터 꺼내는 짓이 나를 정신 나간 인간으로 취급받게
만들지나 않을까 하는 겁이 덜컥 났다.
나는 당황한 중에 명함을 꺼내 건네며 인사를 나눈 뒤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꺼냈다.
“ 실은 우리 국립 공원에서 말을 관광 목적으로 사용하는 계획을 가지고
싶습니다. 어린이나 여성들도 타기 좋게 체구가 작은 몽골 말을 선택해
볼 생각이 있어 몽골 말에 관한 자료 수집을 위해서 왔습니다.”
나는 내가 벌리는 거짓 수작을 본다면 우리 공원 소장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를 거북살스럽게 상상하면서 상대방 몽골 외교관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찾아온 용건이 몽골 말에 있음을 안 풍채 좋은 상대방 외교관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나중에야 나는 말이라는 것이 몽골 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됐다.
말이란 몽골 인에게 제 이의 동포였다.
동포를 알아주는 외국인이 찾아왔으니 이 몽골 외교관은
신바람이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지브르도즈 롬보 참사관이라는 이 외교관은 평양에서 대학을
나왔고 후에 김대중 대통령이 몽골을 방문했을 때 통역으로
텔레비전에서도 얼굴을 보인바 있다.
그의 자녀들도 한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친한파 가족이다.
[註:그는 지금 평양에 있다,].
그는 열을 올리며 그의 국적을 자주 의심케 만드는 유창한 한국어로
몽골 말의 자랑 겸 설명을 오랫동안 했다.
그의 흥미진진한 몽골 말 강의를 거의 끝머리에 일방적인 자기나라
말 자랑만 한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가 말꼬리를 한국으로 돌렸다,
“나는 지난 여름에 진도에도 갔다 왔어요. 한국인들의 진돗개 사랑도
대단하더군요. ”
진돗개의 고향에 몽골사람이 왔다 가다니 !
나는 침을 삼키며 드디어 본론을 꺼낼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은 충격적이었다.
나의 입장을 배려해서 한국 동물로 화제를 옮겼던 그는 어쩔 수 없는
몽골 애국자답게 또다시 몽골 개 자랑으로 되돌아갔다.
나의 관심은 고조되었다.
“ 몽골에도 좋은 개가 있어요. 눈 위에 점이 있어서 네 눈을 가진 것
같은 개인데 무척 사납지요”
롬보 참사관은 양손으로 두 개의 동그라미를 만들어서 두 눈 위에
얹어 네눈박이의 흉내를 냈다.
나는 또 다시 충격을 받았다.
라이카가 몽골에도 살고 있구나!
정체가 오리무중이었던 몽골개가 라이카였던 것이다!
나는 내가 묻기도 전에 롬보 참사관의 입에서 스스로 흘러 나온
폭탄 같은 말의 충격에 발동기처럼 달아오르는 심장의 박동을
겨우 달래면서 물었다.
“ 혹시 그 개를 라이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롬보 참사관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 몽골에서는 노호이라고 불러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나의 업무 노트를 꺼냈다.
노트 겉장의 뒷면 비닐표지 안에 나의 가족사진이 있었다.
내가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는 이 가족사진은 삼 년 전에
찍은 것이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우리 가족들이 포즈를 취할 때 갑자기 진송이가
뛰어와 아들에게 안기는 바람에 그도 마치 가족의 한 사람처럼
사진의 한 구석에 의젓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나는 사진의 중앙에 앉아 있는 진송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 이 개와 비슷합니까?”
롬보 참사관은 입을 쩍 벌렸다.
“ 아니 이 노호이를 어디서 구했습니까?”
나는 몸을 감싸는 전율에 침을 꼴깍하고 생겼다.
“ 색깔은 검지만 진돗개입니다.”
“ 네에?”
나는 비로소 이곳에 온 용건을 사실대로 밝히고 진돗개와
몽골 개와의 관계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말씀하신 라이카가 시베리아 개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우리 몽골이
이렇게 작아졌지만 시베리아는 엄연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고
지금도 일부 몽골 민족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
“ ? ”
“ 러시아의 부리아트 공화국이 순수한 몽골 민족의
자치 공화국입니다.바로 몽골의 북쪽 시베리아에 위치하고 있어요.
사실 왕년에 세계를 제패하던 몽골민족은 유감스럽게도 우리 몽골
공화국과 중국의 내몽고, 그리고 부리아트 자치 공화국등
세 나라로 나뉘어져 있어요.
민족 분단의 아픔은 한국보다도 더 크다고 해야 할 듯하지요.
그러니 라이카가 몽골에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몽골과 시베리아는 지리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붙어 있었던 것이다!
지도를 보고 자세히 분석해 보지도 않고 지레 짐작으로
수만리나 떨어져
격리돼 있는 별개의 지역으로 오해했던 것은 분명 나의 실수였다.
롬보씨는 진송이의 모습을 보고 또 보며 몇 번을 탄복했다.
“ 이 사진을 보고 노호이가 아니라고 할 몽골 사람은 없겠는데요.”
나는 그의 태도에서 라이카=몽골개=진도개 조상의 공식성립에
틀림없는 확신을 가졌다.
이미 밖은 어두움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롬보 씨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언제든지 나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십시오. 선생의 조사가
결실을 맺으면 몽 한 양국의 친선 도모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터이니
껏 도와 드리겠습니다.”
문 밖까지 전송 나오며 롬보씨가 한 격려의 말을 가슴에 담고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강원도 근무지로 돌아온 나는 박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박 선생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잘됐군! 그러나 지금까지 발견 결과만 가지고 라이카가
진돗개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야. 진돗개
조상연구는 지금 부터 인 것 같구만.
지금부터 몽골개 즉 라이카가 어떻게 한국에 와서 어떻게 진도로
흘러 들어가 진돗개가 됐는지를 알아볼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네 ! ”
맞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얻은 결과는 체계적인 조사가 아닌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좀 더 체계적이고 문헌적인 접근을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로 박 선생을 방문했다.
박 선생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한국 야생 동물기를 복사할 수 있도록
빌려주기를 청했다.
박 선생은 이 글 앞에서 소개했던 한국 야생 동물기를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 가져도 좋으니 자네 연구에 꼭 결실이 있도록 잘 활용 하게나. ”
나는 이 귀중한 자료를 박 선생이 얼마나 아끼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책을 나에게 준다는 제의를 그냥 받아들일 수만은 없어서 나는
그 책을 며칠 간 복사한 뒤 다시 돌려주었다.
[註; 여기서 라이카의 색깔에 대해 짚고 넘어 갈 것이 있다.
미국 인터넷 검색을 해보거나 국내에 들어온 시베리아 이스트 라이카의 색깔은 롬보 참사관이 묘사한대로 두 눈 위에 누런 점 대신 넓다란
면도있고 전체 색깔이 불랙 앤드 탠이 아닌 것도 있고 더 나아가
얼룩이 까지 순종 대열에 끼어있어서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몽골 라이카의 생 생김에 대한 조사를 해보았다.
몽골에 오래 살다온 분의 저서에도 그렇게 써있고 직접 몽골 사람을
만나 물어 보아도 네눈박이의 라이카가 몽골 노호이의 대종이었다.
신뢰성를 더 하기위해 조사를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알아보았다.
지금 흑룡강 성 북쪽은 내몽고 자치주의 일부로서 몽골족이
살고 있다.
젊은 시절 이곳에서 군대 생활을 한 중국 동포의 말에 의하면 이 곳의 소수 수렵 민족인 오르촌 족이 이 라이카를 데리고 사냥을 많이 다녔는데 거의 네눈박이에 블랙 앤드 탠이었다고 했다.
또 5,60년대에는 중국 연변에도 매우 드믈었지만 이 라이카가 살았는데 현지민은 단순히 사냥개라고만 불렀었다.
이 개들도 진돗개 흑구를 크게 해놓은 네눈박이었다고 한다.
30년대에 촬영한 러시아의 라이카들도 역시 거의 네눈박이였다.
러시아의 라이카는 이차세계 전후 한 때 멸종의 위기를 겪었다고 하는데, 이 무렵 러시아 라이카의 표준 체형에 무슨 변화가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몽골 라이카와 시베리아 라이카 사이에 차이가 있는 듯 같고
롬보 참사관이 이야기 한 대로 몽골 라이카는 흑구와 닮은
네눈박이가 표준형인 듯하다.
국내에 별별 라이카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데 네눈박이 라이카는
늑대 라이카라고 불리우며 특별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진돗개 흑구에도 눈위의 점 대신 면이 있는 것도 있고 재구니
호구니 하는 별종스러운 개도 있으니 이런 변이에 대해서 융통성을
가지고 보기로 하자]
7. 이 설[說] 저 설[說].
이 책을 얻는 행운을 계기로 나는 지금까지 모아온 진돗개 관련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 가봤다..
박 선생이 이야기 한 대로 몽골 라이카가 어떻게 해서 이 이국땅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지, 또는 현재 진돗개와 고대 진돗개의 핏줄을
엮어 줄 사건이 있었던가 하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한심할 만큼 빈약한 자료의 현실은 개에 대한 한국인이 관심이
어느 정도 소홀했었고, 또 그 결과이겠지만 그 방면의 연구 역시
어느 정도 부실 했었는가를 보여 주는 본보기라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몽골 라이카의 혈통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받아 가히
진돗개의 적자[適子]라고 할만한 흑구의 비참한 운명이 어이없이
결정된 1967년도의 무슨 회의가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빈약한
정보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 졌는지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나는 그간 모아둔 여러 기록들을 다시 한 번 검토하면서
몽골 라이카가
한반도 남단의 땅 진도 땅에 흘러 들어와 진돗개가 된 과정들을
면밀히 찾아보았다.
몽골개의 진돗개 조상설을 담은 기록들은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근거가 있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그저 “.....이런 이런 사실로 보아 ....
이럴 것이다.” 하는 엉성한 추측의 기록이었다.
하나는 고려 때 진도로 밀려온 삼별초를 쫓아온 몽골군이
데려왔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 설은 상식적으로 언뜻 보아도 가능성이 희박했다.
몽골군은 진도를 초토화시키면서 삼별초를 토벌한 뒤
곧 진도를 떠났다.
그들이 진도에 주둔했던 기간은 극히 짧았다.
설사 몽골개가 경비견 등의 목적으로 군대를 따라 왔었다해도
민간인과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됐을 살벌한 전장 분위기 속에서
엄격한 군기아래 관리했었을 군견이 과연 이 짧은 기간에 어떻게
초토화된 진도에 그 씨앗을 퍼뜨렸을까는 극히 의심스러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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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얼마전 다른 독자가 다른 글에 단 답글을 소개한다
그는 이 방면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 사람 같았다.
---진도개의 유래에 대해 다양한 썰이 있지만 몽골군 유래가 가장 터무니없다고 봅니다. 진도의 1차 공격에는 몽골군이 참여했지만 패전으로 상륙하지 못했고 2차 공격의 몽골군 지휘관이 홍다구인 걸로 보아 이름만 몽골군이지 쌍성총관부의 고려인 부대였을 겁니다. 더구나 2차 공격에서 진도 함락은 겨우 10일밖에 안 걸렸으니 거기서 죽치지 않은 한 개씨를 떨궈 놓을 틈도 없었을 겁니다. 더더구나 진도개가 몽골 유래라면 몽골에 원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견종이 있어야 앞뒤가 맞지 않습니까? ---
그는 나처럼 라이카가 몽골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답글을 단 것같지만 나보다도 더 몽골 토벌군의 진돗개 조상 전파설을 부인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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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설은 이렇다.
삼별초가 토벌된 뒤 진도민 삼만 명이 몽골군에게 강제로 몽골까지
붙들려 갔다가 일 년만에 되돌아 온 일이 있었다.
고려사에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그 먼 곳까지 이와 같이 다수의 인간들을 왜 또는 어떻게 데려
갔는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후에 홀절사팔팔함사라는 긴 이름을 가진 진도민[珍島民] 포로 출신의
원나라 라마교 승려가 외교사절로 고려에 왔었다는 일화를 보면 어쨌던
사실적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종의 감시 받는 죄인 신세에다가 제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들었을 도보 이동의 피납인들이 수륙만리 그 먼 길을
오면서 몽골의 개까지 데리고 돌아올 큰 이유나 여유가 있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리고 그 무렵 정치 상황을 보면 이 진도민의 몽골 유배설은
무리가 있다.
이미 몽골인 주력은 몽골을 떠나 중국에 대거 옮겨온 터였다.
나아가 수송의 기계화가 전무한 그 무렵, 대인원을 대륙 깊숙한 몽골로
이동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한 식량 운송 문제만 해도
대단히 큰 문제이다.
짐작컨대 진도민의 노동력이 필요하여 해상 수송 방법으로 중국
해안지방으로 데려 가서 부려 먹다가 그냥 돌려 보낸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신빙성이 없어 보였던 추측 수준의 윗 가설들을
좀 더 조사를 해보자 역시 잘못 된 것들임이 들어 났다.
진도는 고려 말 극에 달한 왜구의 행패를 버티지 못했던 정권이
섬 전체의 거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 전체를 장기간
비워 두었다가 거의 백년의 세월이 지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조 태종 때야 행정기구를 다시
설치하고 군민들을 들여놓았었던 역사 단절의 시기를 겪었었다.
태종 14년의 조선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임금은] 지해진 군사[知海珍 郡事]에게 명하여 군민을 거느리고
다시 진도 구지로 들어가게 했다. 진도군은 원래 남해 가운데 있었는데
일찌기 왜구로 인해 내지로 옮겼다가 이제 해안이 평안해 졌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100년에 가까운 공도 정책 뒤 관원이 섬에 들어가 수색해보니 몰래
영을 어기고 여기저기 골 안에 숨어 들어와 사는 인구가 겨우 500명
내외였었다.
이 정도의 주민 규모는 진돗개의 조상 추리에 들이대기가 너무
민망스러운 소수이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를 않았는데 몽골개가 진도에 남아서
그 씨를 퍼뜨렸다는 위의 설들은 깊은 연구도 없이 그저 구전돼 오던
몽골개의 진돗개 조상설을 그저 진도와 관련 있었던 몽골인들의
사실[史實]과 억지춘향이 식으로 꿰맸음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진도 역사에 있어서 진도 공도화(空島化) 정책의 오랜 기간은 진돗개
조상 찾기에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진돗개의 역사는 바로 이 시점, 공도 정책이 끝나고 이주가 새로
시작된 조선조 들어와서 부터 그 뿌리를 남기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어떠한 가설도 진돗개 조상과
관련 있음이 성립될 수 가 없는 것이다.
8. 신뢰감 있었던 모리[森]의 설
마지막 설은 좀더 설득력 있는 신빙성을 띄고 있다.
고려 때 몽골 인들이 진도에 말 목장을 설치 한 뒤 말들을 돌보기
위해서 몽골 개들을 데려 왔다는 것이다.
이 설은 시기에 문제가 있었지만 위의 구름 잡는 듯한 막연한 추측일
수밖에 없는 위의 두 설에 비하면 몽골 라이카가 진도에 유입 되게 된
과정을 확실히 타당성 있게 설명 해주고 있다.
나는 일단 이 말에 가능성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좀 더 조사를 해보고 나는 이 정보가 틀린 것임을 발견했다.
고려 때 몽골 인들이 진도에 말 목장을 설치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었다.
진도에 말 목장이 들어 선 것은 한참 뒤인 조선조가 열린 뒤였다.
여기에 한 일본인이 머리를 내민다.
앞서 잠깐 소개 한 바대로 1936년 업무 차 전라남도 광주에 들렸다가
우연히 사냥 잘한다는 진돗개의 소문을 들은 총독부의 시학관으로
근무했던 모리{ 森 爲三 }는 그 이듬해 37년 2월 진도까지 찾아가서
진돗개의 뛰어난 성품을 직접 확인했다
경성으로 돌아온 그는 상부에 건의해서 진돗개가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진돗개를 추천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 말로만 전해 올뿐 문헌에는 없으나 진도의 지산면[智山面]에
이조시대 이왕가의 목장이 있었으며 그 목장지기 개가 있었는데
그 개가 오늘날의 진돗개요,
진도에 조선의 고유 견이 보존 된 이유라고 생각한다.’
모리의 말대로 위의 사실이 기록에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 나는 다른 일로 조선 실록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위의 기록을 찾아냈다.
고려가 몰락하고 조선조가 들어 선지 얼마 안 된 태종 조 때 강화도,
임자도, 그러고 진도 등의 몇 개 섬에 말 목장을 설치하고 제주도에서
말들을 이송하여 번식시켰다.
그 뒤 말을 기르는 목장이 한반도의 여러 섬과 곶으로 확대되어 갔다.
홍주 대산곶, 순천 백아곶, 연평도, 진주 흥선곶, 안면도, 독진곶등,
주로 남해안과 경기도 해안 일대가 이들 말 목장이 있었던 곳들이다.
현재는 이름조차도 전해지지 않는 이런 섬이나 해안 등의 외진 곳들만
골라 말 목장이 들어선 것은 그 무렵 한반도 전역에 우글거리던
호랑이들 때문이었다고 하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키 힘든 일이다.
하여튼 진도에 말 목장이 들어선 것은 1414년이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이해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공도화[空島化]되어
있던 진도에 다시 관리와 군민이 되 돌아온 해 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때는 이미 공룡 같았던 몽골제국이 소멸의 단계로 들어선 지
한참 뒤였다.
중국의 원 왕조는 벌써 고려 때 멸망하여 북쪽으로 쫓겨 갔기
때문에 극동 땅에서는 몽골 라이카는커녕 몽골 인들의 자취를
찾기도 힘들었었다.
그렇다면 제주도에서 데려온 말들에게서 무슨 몽골 라이카의
진도 유입 단서를 찾는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금새 생각을 고쳐먹었다.
제주의 말 들중 토착말도 있었지만 일부는 원래 몽골 인들이
가져온 것들이었다.
충렬왕 2년, 다루가치라는 이름의 제주 행정 책임직에 부임했던
몽골인 관리 탑자적이 소,낙타,나귀,양들과 함께 몽골말 160마리를
들여와 제주 동쪽 수산평이라는 곳에 방목한 것이 몽골말의
제주 시대를 열은 효시였다.
[註:수산평은 지금의 제주도 성산읍의 수산리 지역이다.
돌은 많지만 넓은 초원이라 목축을 하기에 좋은 지역이다.]
고향 몽골의 초원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이곳 이역만리 섬에
정착한 몽골 말들은 토착 말들과 혼혈의 단계를 거치기는 했지만
기적 같은 적응력을 발휘하여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남아
오늘날 한국 제주 말의 한 조상이 되었다.
제주화한 몽골 말들은 생존의 수준을 뛰어 넘는 엄청난
번식 능력을 발휘했다.
제주 말의 번식이 최고조에 달했던 조선 숙종 때는 무려 5만 마리나
되는 말을 키우는 대목장주가 제주에 출현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몽골의 초원과 비슷한 제주의 특수한 지형에
힘입은바 클 것이다.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郞]씨는 오사카 외국어 대학
몽골어 학과 졸업이라는 그의 특이한 학력이 말해주는 것 과 같이
몽골에 관한 관심과 지식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다.
그는 제주도에 두 번이나 와보고 쓴 기행문에 제주의 풍토 지리가
너무나 몽골과 유사함에 았던 깊은 인상을 자세히 서술했었다.
제주도의 말뿐만 아니다.
몽골 인들도 원나라의 직할령이었던 제주도 지역에 자리를 잡고 인구를
불려가며 고려 말 공민왕의 대 토벌이 있기까지 거의 독립국 같은
위세를 부렸었다.
이쯤 제주도의 그 무렵 사정을 안다면 누구나의 머리 속에 떠오를
만한 것은 몽골의 말과 사람뿐만 아니라 몽골 개까지도 제주도로
건너와 이곳을 고향 삼아 번성을 누리지 않았을까 하는 강한 추리적
상상이들 것이다.
내가 훨씬 뒤에 발견한 역사의 한 사실이 위의 가설에 강한 신뢰성을
얹어 주었다,
고려 충렬왕 때 몽골개 80 마리가 제주도로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개를 이렇게 따로 들여온 것은 아마 목축의 목적이 아닌 사냥등에
대한 대량의 요구가 있어서 인 듯하다.
그리고 이들 개들이 라이카들이었고 그들이 말처럼 번성했을
가능성은 한국 야생 동물기에 한 대목이 소개 되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 이 상오 씨는 한 반도에 존재했었던
재래종 개들을 대 중 소 세 종류로 분류하여 소개했다.
이 글의 테마인 진돗개가 바로 소형 견이고 거제개가 중형 견이며
제주개가 대형견이었다.
저자 이 상오 씨는 대형견인 제주개의 색깔이 검거나 잿빛이라고 썼다.
이것은 바로 몽골개인 이스트 라이카의 색깔과 같았다.
게다가 이 상오 씨는 이 제주개를 제주도에 거주했던 몽골인과
제주말과 연결해서 그 근원이 몽골에 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 섬 개 가운데서 제주 개만이 가장 몸집이 크니 어깨까지의 높이가
1자8치 때로는 2자1치까지의 대형에 가까운 것이 많았다.
< 註 참고로 말하자면 진돗개는 평균적으로 1자 3치 정도이다.>
물론 1자5치 이하의 소형인 것도 있었지마는 일반적으로 체모는
흑색 내지 회색이어서 진돗개의 적색 내지 흰색과는 전연 다르다.
성능 기타 여러 가지로 보아서 육지의 개와도 적이 다른 점이 있으니
필자의 추측으로서 이조시대 몽골 말을 수입하여 방목하던
양마장이었으니 그와 무슨 관련이 있지 않은가 싶다.’
위에 언급된 개의 특성, 대형이라던가, 털의 색깔은 그 개가
몽골인들이 기르는 라이카와 비슷함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몽골이라는 머나먼 지리적 원격지와 진도라는 한국 남단의
섬인 진도의 아리송한 거리를 메우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던 내가
긴가민가하면서도 몽골에 비하면 옆집이나 다름없는 제주도의 개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9. 또 다른 제주개
지금까지 내가 이상오씨의 책을 자주 읽었으면서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위의 제주개에 대한 구절은 나에게 또 다른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제주도 축산 시험장에서 순종 번식을 목적으로 제주개들을
증식시키고 있었다
이 사실이 잊혀 졌다가 비로소 나의 머릿 속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앞에서 소개한 이상오씨의 제주개가 또한 제주개라
불리는 축산 시험장의 개들과 너무도 다른 점에 크게 당황했다.
이상오씨의 라이카를 암시하는 제주개와 축산 시험장의 제주개는
너무 달랐다.
진돗개 황구와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그 개는 장대처럼 위로
빳빳하게 고추선 장대 꼬리가 특징이었다.
몽골 라이카와 전혀 닮지도 않았으면서도 제주개라 불리 우는
이 개의 정체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註: 이제부터 제주개라는 명칭을 잘 헤아려 보며 읽어주기 바란다.
제주 라이카와 지금의 제주개와의 명칭상 혼동이 불가피하니
유의해주기를 재삼 부탁드린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제주 라이카는 몽골인이 데려온 개,제주개는
지금도 제주에 많이 있는 토종개를 말한다.]
먼저 의심을 가져본 것은 행여 제주도의 관계자들이 제주개의
진짜 정체를 잘 모르고 엉뚱한 개를 제주 개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제주개를 기르는 축산 부서에 전화를 해보고 그 곳의 젊은 직원이
이 상오 씨가 묘사한 검정 색의 대형 제주 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이 점에 더 한층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내 얇은 지식의 한계는 금방 들어 났다.
나는 직장 동료의 친척이며 나에게 진송이를 넘겨준 분의 소개로
진도에 거주하는 최 모씨라는 분을 알고 있었다.
소싯적부터 진돗개를 데리고 사냥도 많이 했던 이 전문가는 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진돗개 표준이 아니라 진도에 전래해오는 사냥 진돗개의 표준을 굳게 신봉했다.
근래에는 사냥에 손을 떼었지만 사냥 전문의 진돗개를 육종함에
숨은 노력을 아끼지 않는 분이다 .
(이 분에 대해서 나중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나의 기본 가설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린 엉뚱한 개의 출현으로 골머리를 앓던 나는 어느 휴일 오후에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가짜 제주개라고 지레 짐작했던 이 장대 꼬리의 개에 대해서 그 분은 생생한 증언으로 나의 기대심을 산산이 깨버렸다.
“ 제주개 말입니까 ? 장대 꼬리를 가진 놈을 말하지요 ?
그 개들도 사냥을 상당히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진도에 살다가 제주로 이사 간 나의 어린 시절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여기 살 때 무척 개사냥을 좋아했었는데 제주도로
이사 간 뒤에도 제주개를 가지고 한라산 산록을 누비면서 사냥을
했었습니다.
가끔 진도의 고향에 돌아오면 제주개도 진돗개 못지않은
사냥 능력이 있다는 말을 하곤 했었지요.”
나를 당혹하게 만든 최 선생의 증언은 그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 말 저 말로 제주개를 소개 하다가 또 한마디를 했다.
“ 해방 전후에서 60년대까지 장대 꼬리의 제주개가 진도에도
자주 들어와 진돗개로 둔갑해서 팔린 일이 많았어요.
이건 장대 꼬리를 가진 진돗개가 우수한 사냥개라는
소문 때문일 것입니다 .
그 때만해도 진돗개나 우수한 사냥개라고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 제주 개는 존재도 없었고 따라서 값도
나가지 않았지요.“
나는 최 선생과 대화 후 머리가 띵하였다.
내가 철석같이 믿었던 몽골 라이카가 제주개가 아니라 깡마른
장대 꼬리의 개가 제주개가 맞다니 !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상오 씨의 말이 거짓이란 말인가?
나는 이 골치 아픈 장벽을 넘을 수 없어서 후퇴 한 채로
그저 몇 달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나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비록 눈앞에 제주개라는 움직일 수 없는 실물이 있었지만
나는 축견 전문가 이 상오 씨의 글을 전면 부정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확실한 실물이 있는 현실의 진돗개와 이 상오 씨의 가설적
제주개의 존재를 다 인정하기로 했다.
육지로 친다면 일개 군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넓이의 제주도
땅위에 크기와 생김새, 그리고 색깔마저 전혀 다른 두 종류의
개가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제주도의 인구가 밀집된 지역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인구가 50만을 웃도는 대 식구의 지역사회가 되었지만
몽골족이 제주도에 진입하기 시작할 무렵의 제주도 인구는
불과 만여 명에 불과 했다.
몽골인들이 계속 유입되고 목장 등의 개발도 진행이 된 결과 몽골
지배가 공민왕에게 종식 될 무렵에는 삼 만 명 정도까지 증가했지만
그래도 그 인구의 크기는 지금의 면 단위 수준에 지나지 않았었다.
개가 인간에 종속된 가축이라는 면에서 봐도 제주도의 인간 집단은
상이한 두 종의 개가 각각 발생 될 수있는 크기가 되지를 못했다.
이 사실로 보면 결국 한 종류의 개는 타처에서 들어온 인간 집단을
따라서 제주도로 이식되었다는 결론을 유출해낼 수가 있다.
제주도에 들어온 인간 집단 --- !
그 것은 몽골 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몽골 인들을 따라온 몽골 라이카가 제주개가 되었다는
애초의 가설도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 사고의 전환은 뒤에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해서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다.
나에게서 흑구를 사간 인연으로 친해진 정 근우라는 진돗개
애호가가 있었다.
그는 속초의 자동차 영업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애견 센터를
부업으로 운영하는 진돗개 전문가이기도 했다.
그는 전문 영업인답게 발이 아주 넓어서 아는 사람이 많았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진돗개 전문가는 거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신차 판촉 차 나의 직장에 들렸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이이야기 저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제주도에서 말하는 제주개 쪽으로 몰고 갔다.
뜻밖에도 정 소장은 참고가 될 만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 얼마 전에 진돗개 책을 낸 B씨를 아시지요?”
“ 알지.”
“ 그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자기가 중국 여행 중에 남부의
절강성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희한하게도 제주개와
꼭 같이 생긴 개들을 보았답니다.”
나는 나중에야 위의 발견이 B씨가 아니라 일본인 에자카라는
교수에 의해서 발표되었다는 말을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B씨가 남의 발견을 자기 것인양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비교적 엷은 지식이 축적 될 수밖에 없는 한국 애견계에서 서로
전문성을 다투다 보니 이런 일도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그 말은 나의 흥미를 부쩍 끌었다.
“ 절강성은 남방인데---- ? ”
그간 나는 비록 사진으로만 보았지만 어쩐지 빈약해 보이는
체구의 제주 개로부터 파리아견이라고도 부르는 남방견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 제주개가 바다를 건너왔단 말인가 ?”
나는 진작부터 한 반도의 자연과 민족 형성에 남방으로부터의
전래 요소가 적지 않았을 것을 믿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 알만한 사람이라면 얼른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멀고 먼 남쪽 아열대로부터 물결에 밀려와 제주도에 자리를 잡고
번식을 거듭한 끝에 이제는 인간들에 의해서 건강식품으로까지
상품화된 선인장이 그 것이다.
‘ 식물이 바다 건너왔는데 배를 짓고 항해를 할 줄 아는 인간의
종속물인 개가 못 올 리가 없다.’
이웃 일본 민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잘 보이는 가무잡잡한 피부와
작은 체구의 신체적 특징이 바다를 건너온 남방 도래인이
그들 조상의 한 주류였던 탓이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상식이다.
나는 역시 어느 잡지에 실렸던 제주도의 석상, 돌 하루방의
남방 전래설과 북방 전래설을 주장하는 두 학자들의 논쟁도 상기
해봤다.
결국 나는 고대 제주도의 원주민들 중에 남쪽에서 배나 뗏목을 타고
중국 해안을 따라 긴 항해를 한 끝에 제주에 와서 정착했을 남방 계통의 인간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보고 지금의 제주개 조상이 이들과 함께 남방에서 왔슴을 결론짓기로 했다.
물론 제주 개는 긴 세월간 토종개들과 교잡을 거듭해서 원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몽골인들을 따라서 이주한 북방견 계열의
라이카가 제주의 또 다른 토착 견이 되었을 것이다.
제주도는 지형적 이유와 역사의 장난으로 반 천년을 남방견과
북방견이 공존해왔던 독특한 역사를 같게 되었던 것이다.
이쯤으로 불거져 나온 제주개의 문제를 정리하고 보니 이 상오 씨가
말한 제주개가 과연 몽골 라이카인지 입증해줄 수 있는
더 확실한 근거는 없었지만 아쉬운 대로 앞서
소개한 모리(森)가 추측 했던대로 몽골 말과 함께 제주도에
유입되었던 몽골 라이카가 조선조 초 진도로 옮겨진 말들을
따라 와서 진돗개의 조상이 되었다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순수한 라이카가 진도에서 생존해 내려왔다는 말은 아니다.
진도에 온 라이카는 수백 년의 세월을 흐르면서 근친 교배로 인하여
왜소화되었을 것이며 여기에 더해서 토종개나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잡견들과 어쩔 수 없는 교잡도 하면서 오늘의 진돗개로 변신해
갔을 것이다.]
10. 깨진 모리[森]설.
그러나 고심해서 얻었지만 어느 모로 봐도 엉성했던 나의 결론은
한 달도 안 되어 깨져 버리고 말았다.
모리의 가설에 찬성표를 던진 나의 결정이 오류였음이 들어 난 것이다.
나는 그 달말 서울로 당일치기 출장을 간 김에 롬보 참사관을 찾아갔다.
이미 끝이 보이는 것 같은 나의 조사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몽골개의
제주도 유입에 관한 추가 정보가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때는 점심 식사 때였다.
롬보 씨와 나는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자리를 잡자 말자 나는 내가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 여러 가지로 조사해본 결과 몽골 라이카는 제주도를 경유해서
진도로 온 것 같습니다.”
나는 모리의 가설에 그간의 조사 결과를 그럴듯하게 가미한
나의 견해를 들려 줬다.
그러나 롬보씨의 반응은 의외였다.
머리를 갸웃둥 거리던 롬보씨는 나의 의견에 조심스러운 반대 의견을
내 비쳤다.
“ 그 것 참 이상하군요......”
나는 당황했다.
“ 왜요?”
“ 몽골인인 저로서는 말이 가는 곳에 반드시 개가 따라 가야 한다는
가설에 찬성할 수가 없읍니다.”
“ 아니. 목장에 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몽골의 목장에는 개들이 있어요. 그러나 이들 개들의 소임이
다릅니다.
몽골 말들은 억세서 개들 따위에게 부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개들은 몽골에 득시글거리는 이리들로부터 말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진도 같이 좁은 곳에 이리가 얼마나 있다고 개들을 데리고
갔겠습니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일단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조선조 때 섬과 곶의 외진 곳만 골라 말
목장을 설치한 이유가 호랑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롬보씨의 의견을
지지하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개가 말떼를 지켜주어야 할 만큼 진도에 늑대가 많았다면 진도에
말 목장을 열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는 물론이고 각 도서의 말 목장들이 놓아먹이는
방목의 형태가 아니라 목책을 두르고 가둬 기르는 목축이었던 만큼
놓아기르는 방목 형태에서나 요구 될 개의 필요는 더욱 없어 보였다.
그가 몽골인다운 전문성을 바탕으로 펼쳐본 추리는 어느 모로 보나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만한 빈틈을 보여 주지 않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의 정확한 지적은 나를 무력함을 한 아름 껴안은 끔찍한 낙망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나는 어린 시절 초원에서 양을 기르며 생활했던 추억담을 시작으로
몽골의 양과 말 이야기들을 끝없을 만큼 들려주는 롬보씨의
재미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면서도 자꾸만 초조해지는
나의 심정을 어쩔 수 없어 수저를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점심을
거의 들지를 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한동안 방향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를 고민했다.
지금까지 자료라고 모아 봤지만 한심한 수준이었고 더 이상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도 자신을 할 수 없었다.
[註: 제주 라이카로 추정되는 개를 제주도에서 목마견[牧馬犬]으로
알려져 온 것을 나중에 알았다.
개가 말의 사육에 사용되었다는 말인데 이것은 롬보씨의 말과
조금 맞지 않는다.
이 점 더 깊은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11. 이미 해방 전에 일본인이 끝낸 진돗개 조상 조사.
바쁜 업무로 더 이상의 조사에 진척이 없는 가운데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박 선생이 설악산 남쪽에서 바삐 일하고 있는 나에게 전화를 해왔다.
주말에 시간이 나면 자기 집에 와서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전갈이었다.
나는 그와 적조 했던 기간도 길었던지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 토요일 나는 정오쯤 일과를 끝내고 바삐 그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문안 인사가 끝나자마자 그는 나를 부른 용건을 꺼냈다,
“ 여보 서 과장 . 진돗개 연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 ”
“ 그저 그렇습니다 .”
“ 그래 ? 생각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군 ”
“ 제 능력도 한계가 있고 시간도 없고 자료도 구하기 힘들고 -----”
“ 자료가 없다고 ? 내 이번 서울에 간 김에 X 일보에 들렸었지 ”
“ 내가 옛날에 진돗개의 조상이 라이카라는 글을 어느 신문에서
읽은 일이 있었다고 했잖는가 ? ”
“ 네 ! ”
“ 아무래도 그 기사가 당신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지.
그래서 무턱대고 그 신문사를 찾아 가서 자료 검색을 해봤어 !
나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세상 참 좋아 졌더군 !
컴퓨터를 몇 번 두드리니까 금방 그 기사가 튀어 나오더라구”
나는 놀랬다.
“ 아니 그게 가능했습니까 ? ”
“ 그럼 ! 이걸 보라고! 여기에 그 기사가 있으니 한 번 보시지! ”
나는 그에게서 복사된 기사를 빼앗듯이 받아 들었다.
그 기사는 1975년 5월 16일자의 오래된 것으로서 놀랄 내용의 진돗개 연구를 담고 있었다.
진돗개의 조상이 라이카로 추측되며 그 증거로 진돗개의 모질[毛質]이
라이카와 같은 이중모[二重毛]라는 사실과 진돗개 모유에 포함된
유지방의 농도가 라이카와 같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들고 있었다.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란 나의 가슴이 한참 동안을 뛰는 것을
달랠 수가 없었다.
그간 진돗개와 관한 자료란 자료는 다 찾아 모아 봤지만 이런 구체적인
조사로서 얻은 과학적 데이터를 가지고 진돗개의 조상을 탐색해본 시
도를 기록한 자료는 없었다.
그것은 그간 진돗개 조상 탐구랍시고 해왔던 나의 모든 노력과 실적을 비웃는 까마득하게 높은 고차원의 연구 조사 업적이었다.
더구나 기사가 났던 1970년대는 아직도 냉전의 얼음이 꽁꽁 얼어있던
분단의 시기였다.
내가 경험했듯이 그 무렵 분단의 장벽 저 너머 깊숙이 숨어있는
라이카는 남한 애견가들에게 볼 수도 없었던 환상의 존재였다.
그런 라이카를 샅샅이 조사 한 듯한 조사 결과가 이 불가능 해 보이는
시절의 신문에 발표 되어있는 것이다.
나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한참이나 계속되는 것을 보고 박 선생은
한마디 거들었다.
“ 얼이 빠져나간 표정이 볼만 하구만 ! ”
“ 박 선생님도 무심하시군요. 이런 기사를 보셨으면 미리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미리 저에게 말씀 해 주셨어야죠.”
나는 원망하는 말투로 박 선생에게 응수했다.
박 선생은 고개를 가로 지으며 부정했다.
“ 나도 몰랐어 ! 십 여년 전에 잠깐 �어 본 기사인데 상세한 내용인들
기억 났었겠나
.----- 오히려 라이카가 진돗개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기적 같은 일같이 생각 되누먼.”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는 맥 빠지는 기분을 삭이며 되물었다.
“ 도대체 이런 연구 성과를 남긴 전문가가 누구일까요?”
박 선생은 확신 있는 태도로 대답했다.
생각을 많이 해본 듯 했다.
“ 한국 사람은 아닐거야. 이 연구는 아마 라이카와 진돗개를 동시에
수집할 수 있었던 일정시대에 이루어 진 것이 틀림없어.
일본 통치의 영역에 살던 사람들은 라이카가 사는 북만주와 진도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던 시기였었고 ........ 진돗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해가 1938년이었으니까 해방될 때까지 7년의 짧지 않은
세월이 있었던 셈이니 누군가가 이런 연구를 할 만한 여유는
충분하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그 무렵의 여러 정황이 그런 연구를 할 만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은 일본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고 ........
일본인 중에 당신보다 먼저 진돗개 흑구와 라이카의 비슷함에
주목한 학자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런 연구 결과가 어느 구석이 숨어 있다가 우연히 표면에 슬쩍
노출 됐다고 봐야겠지,”
그의 추리는 의심할 여지없는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아까까지 놀람이 가득했던 나의 가슴 한 자락에 어쩐지 부끄러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과학적 기술이 뒷받침된 그 연구 실적은 지금까지 해오긴 했지만
나의 진돗개 조상 찾기 방식이 치졸할 만큼 유치했다는 생각을
부정 할 수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돗개를 가지고 국견이니 뭐니 별 수선을 다
피우면서도 정작 이런 수준의 연구조차 못하고 있는 국내의
자연 과학 수준이 다시한번 한심스럽게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참을 착잡한 상태에 있던 나에게 오기 비슷한 야릇한
반발심이 생겨났다,
“ 이런 것까지도 일본인에게 뒤져야 하는가 ! 한 번 끝까지
노력해보자 !”
나와 박 선생과의 만남에서 진돗개의 조상이 라이카라는 사실에
큰 확신을 가진 것도 커다란 수확이었지만 그의 연구에 임하는
태도에서 큰 감명을 받은 것은 더 큰 수확이었다.
그가 동물 연구를 해서 성과를 얻는다 해도 무슨 댓가가 있는 것이 아님을 같은 아마추어동물 연구가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자신의 조사를 위해서
비용과 노력이 만만치 않는 서울 출입을 하는 것은 아직 젊은
나로서 크게 배워야 할 연구자의 태도였다.
나는 크게 반성했다.
‘ 그렇다! 땀과 돈의 투자 없이는 성과를 기대 할 수가 없다.’
나는 진돗개 조상을 찾는 조사의 무대를 내 주변인 이 시골 일대에서
서울로 바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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