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상에서는 대부분의 병기가 특별한 고유명칭도 없이 단지 도구로 만들어져 사용되어왔는데 검과 대포만은 예외였다.명검은 옛부터 고유의 이름이 있어 보물로서 소중히 보관하였다.그런 연유에서일까,보통 병기에서는 보기 드문검과 관련된많은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검은 가장 오래된 무기이며,전설에서는 신성 제왕이라 불리우는 황제(黃帝)와 탁록 들판에서 패권을 다퉜던 치우가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오늘날 출토된 청동제 검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상(商:은殷)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상에서 서주에 이르기까지(기원전 16세기~ 기원전8세기)존재했던 금속제 검은 청동제로서 재질상 50cm 정도의 것이었다.그러나 전차전이 유행했던 당시 검은 전쟁터에선 주력 무기로 이용되지는 못했고, 전차에 탄 병사들은 길이가 몇 미터나 되는 과(戈),모(矛),극(戟)과 같은 장병기를 주로 사용하였다.이 병기들을 사용중 손에서 놓치거나 잃어버렸을때 자기 방어를 위해 검을 사용하였다.그 밖의 용도로는 전쟁터에서 목을 자르는 경우나 왼쪽 귀(이경우 괵 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였다.머리는 부피가 커서 가지고 다니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보통 귀를잘라 전과를 증명했다.)를 자를때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동남부 오월 지방(강소성,석강성)이나 이 지역에 인접한 초(안휘성,호북성,하남성)는 하전이나 호수가 많은 지형이어서 군대가 전차보다는 보병과 수군 중심으로 발달되었으며,이런 역사적-환경적 결과로 접근전에 유리한 검이 많이 사용되어 우수한 검이 대량으로 생산될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방에서는 전설적인 명검의 장인으로 간장(干將)과 막사(莫邪)를 만든 오나라의 <간장>, 또 용연(龍淵),태아(泰阿),공포(工布)를 만든 월나라의 <풍호자(風胡子)>, 순균,담로(湛盧),호조(濠曺)어장(魚腸),거궐(鋸闕)을 만든 초나라의 <구치자(歐治子)>가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들이 만든 명검의 이름은 현재까지 전해져 검의 대명사가 되었다.또한 일찌기 초 나라가 있었던 지방에서는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오나라 왕 부차(夫茶)나 월나라 왕 구천(勾踐)이라는 춘추전국 시대(기원전 8세기~기원전 5세기까지)왕들의 이름을 새긴 정교한 검이 출토되고 있다.
최소한 전국시대(기원전 5세기~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서는 야금술이 발전함에 따라(세계 최초의 크롬강 기법 등) 철제 검이 제조되기 시작했다. 특히 오나라나 월나라의 전통을 이은 중국 남쪽의 초나라나 한나라의 철제검은 칼날이 잘들기로 천하에 그 이름이 알려졌다.한나라의 명검으로는 당계(棠谿),묵양(墨陽),함부,등사(鄧師),완빙(宛憑),용연 태아가 있으며,그 위력은 소나 말의 머리를 한번에 베어 떨어뜨릴수 있다고 전해지며,견고한 갑옷이나 쇠로된 팔과 다리 보호구를 벨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또청동제 검도 개량되어 품질이 상당히 우수한 칼을 만들게 되었다.가장 견고한 칼은 그 강도가 쇠로된 칼과 비슷할 정도 였으며,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크롬으로 도금하였다.(실제 진시황릉 발굴 당시 출토된 칼들은 놀랍게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보존상태를 유지했습니다.)전국 시대에는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철제칼은 크기가 80cm에서 140cm까지,청동제 칼은 70cm에서 약 93cm 정도에 이르는 긴 칼도 제조되었다.
위와같이 긴 칼을 만들기 위하여 <칼날과 칼등은 서로다른 재질>을 사용하였다.칼등은 잘 부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드러운 성질의 재질을 사용하고,칼날은 단단한 재질을 사용하였다.재질의 성질을 다르게 하기 위하여 철제 검은 탄소 함유량을 다르게 하고 청동제 검은 동과 주석의 혼합 비율을 다르게 하였다.
연(燕)나라의 형가에 의한 진시황 암살 시도는 간발의 차이로 실패한다. 이때 진시황제가 몸에 지니고 있던 검은 당시 최고의 명검이었다.이 칼은 청동제로 120cm에 이르는 긴 칼이었기 때문에 허리에서 칼을 뽑기가 불편하여(요즘은 170cm 이상 신장의 사람은 쉽게 뽑을수 있다.) 등 뒤에 매차고 다녔다고 한다.진시황제는 이 검을 이용해 형가를 죽여 암살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전국 시대에서 한(기원전 206~220년)나라 때까지가 중국에서 검의 전성지였다.그러나 전성기의 종말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한나라 최대의 적은 북방 유목 민족인 흉노족이었다.이 흉노족의 기병대에 대항하기 위해 한나라도 기병을 만드는데, 이때부터 기병이 발달하기 시작한다.기병과 기병이 싸울 경우 검은 찌르기보다는 베는데 주로 사용했다.서로 옆으로 스치면서 적을 공격할 때는 찌르는것보단 베는 것이 효과적이었다.그러나 찌를경우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휘둘러서 벨때는 검이 부러질 가능성이 높았다.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칼날을 두껍게 하면 좋겠지만 양날을 가진 검은 그렇게 간단히 두껍게 만들수 없었다. 따라서 휘둘러서 상대방을 베는 경우 잘 부러지지 않는 칼이 등장하게 되었는데,그 모습은 양날이 아닌 외날이었으며 제조하기도 더 간단하였다.한나라 이후 양날의 검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싸움터에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이 넓은 양날의 칼에 긴 손잡이를 부착한 <참마검>이 한나라때 부터 출현하는데,이 병기는 전쟁터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군대에서 사용되는 검은 일찍부터 자취를 감추게 되지만, 한나라 이후 관료들은 의장용 검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풍습이 남게 된다.예를 들어 명나라 고관이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설 때는 황제로 부터 직접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표시로 화려한 장식이 달린 <상방검(尙方劍)>이라는 검을 하사 받는 일이 있었다.
중국의 한족과는 다른 전통을 가진 몽고족 등 중국 북방에서 활약했던 유목 민족은 검을 많이 사용하였다.몽고족이 사용한 검은 끝부분이 넓은 것으로,베기 위한것이 아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상대방을 찌르기 위한 것이었다.원래 유목민족들이 이 칼을 주요 병기로 이용한 것은 아니다.몽고족이 중요시 했던 병기는 강력한 활이나 던지는 창이었다.또 몽고족은 접근전에서 검보다도 중무장 기병에 대한하기 위하여 골타(骨朶)나 타격병기를 선호하였다. 훗날 검은 전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민간에서 여전히 무기로 이용되었다.오히려 군대에서사용되지 않게 됨에 따라 민간에서의 소유가 허용되어 무술세계에서는 가장 중요한 무기의 하나가 되었다.예를 들어 무술의 3대 유파중 하나인 무당파(武當派)는 '무당검'이라는 유명한 검이 있었으며 특히 검법이 유명하였다. 또한 도교 의식에서 빼놓을수 없는 도구로서 도사들이 검을 항상 몸에 지니기를 즐겨하였다.(무당파는 도교 계통의 유파임.)
이런이유에서일까,[봉신연의]에 등장하는 선인들은 가끔 강력한 법공을 지닌 검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에서 역수입된 검법- 명나라의 모원의(茅元儀)는 무비지(武備志)에서 당시의 검에 대해 상당히 재밌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이 내용에 의하면 모원의가 활약했던(17세기) 때는 검이라는 무기가 있기는 했지만 실전에서 별로 쓰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 결과 검의 사용법이 거의 전수가 되지 않아 조선에 남아있던 검법(劍法)이 중국으로 역수입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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